내장산과 백암산, 입암산이 들어선 전남북의 경계 부근은 노령산맥의 핵심지대이다. 백양사는 그중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에 앉은 해발 741m의 백암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백암산 일대는 조선 팔경의 하나로 꼽혔는데, 1971년에 전북의 내장산과 묶여 내장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각각 백양사 지구와 내장산 지구로 불린다.
백양사로 들어가는 길은 걱실걱실한 갈참나무와 여릿여릿한 단풍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계곡을 끼고 걸어가는 기분 좋은 흙길이다. 어느 곳보다 수량이 흡족한 계곡물을 왼편으로 끼고 절을 향해 들어가노라면 아담한 이층누각, 쌍계루가 저 앞에 모습을 보인다. 근래에 지은 건물이지만, 뒤편에 높이 치솟은 회백색 바위절벽과, 계곡에 둑을 막아 만든 못물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와 더불은 쌍계루의 모습은 그대로 오려내어 그림엽서를 만들어도 될 만큼 아름답다.
쌍계루 양편으로 갈라져 내려오는 계곡 물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에 자그마한 부도밭이 있고 왼편으로 휘어들면 천왕문이다. 천왕문은 송만암 선사가 한창 백양사를 중창하던 1900년대 초에 지어진 건물이다.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익공식 맞배지붕 집이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판에 적힌 ‘대가람 백양사’라는 반듯한 해서체 글씨는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쓴 것이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마당 가운데 보리수 한 그루가 서 있고 좌우로 스님들 공부하는 방과 요사채, 그리고 고루와 종각이 늘어서 있다. 곧장 앞으로 나아가면 2층 문루인 우화루, 우화루를 지나 들어서면 오른쪽부터 돌아가며 대웅전, 칠성각과 진영각, 극락보전, 명부전이 둘러서 있다. 극락보전을 빼고는 대부분 송만암 선사가 1917년부터 절을 중창하면서 하나하나 세운 건물들이다.
백제 무왕 33년(632), 이곳에 절을 연 여환(如幻)은 절 이름을 백암사라고 하였다. 그후 고려 덕종 3년(1034)에 중연(中延)선사가 절을 크게 중창하여 대찰을 이루어 놓고 정토법문을 널리 펴기 위해 절 이름을 정토사라고 고쳤다. 고려 충정왕 2년(1350)에는 당대의 명문 거족 출신이며 각진(覺眞)국사라는 시호를 받은 각엄(覺儼)존자가 그간 퇴락한 정토사를 다시 일으키고 송본 대장경을 사들여 소장하는 등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벌였다.
조선 시대로 들어와서는 고성 이씨들의 원찰로, 또는 장성현의 자복사찰로 유지되다가 설파 상언(雪坡 尙彦, 1707~1791)과 연담 유일(蓮潭 有一, 1720~1799)이 이 정토사에 주석하게 되면서 그들의 문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주지를 맡게 되었다. 설파와 연담은 서산(西山)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의 4대 법손으로서 영조 1년(1725)에 김제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어 대성황을 이루었던 환성 지안(喚惺 志安, 1664~1792)대사의 법손들이다.
이후 1917년부터 절을 대대적으로 중창하여 지금의 백양사를 이룬 만암(曼庵)선사(1875~1957)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오는 설파와 연담의 문손들 가운데는 양악(羊岳)·백파(白坡)·한양(漢陽)·설두(雪竇)·금담(錦潭)·환응(幻應) 스님 들이 있다. 이 가운데 백파 스님은 고창 선운사에서 출가했지만 백양사 운문암에서 강석을 베풀어 선풍을 드날리기도 하고, 만년에 추사 김정희와 편지로 선에 관한 논쟁을 하며 교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인연으로 추사는 백파 스님의 비명을 짓고 썼으며 백파 스님 문손들의 법호도 미리 써 주었다고 한다. 위에 든 스님들의 법호 가운데 설두, 환응, 만암, 그밖에 다륜(茶輪), 석전(石顚) 등이 모두 추사가 미리 지어 놓은 것으로 후에 합당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한편 정토사라는 절 이름이 언제 백양사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선조 때라거니 숙종 때라거니 하는 전설이 있지만, 헌종 때나 철종 때의 기록에도 여전히 백암산 정토사라고 쓰인 것으로 보아 그리 오래 된 일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전해지기로는 설파 스님의 법손인 환양 팔원(喚羊 八元)선사가 약사암에 있으면서 늘 불경을 외웠는데, 어느 날 뒷산 백학봉에서 흰 양 한 마리가 내려와서 법화경 외우는 소리를 다 듣고 돌아갔다. 그 뒤로 백암산 정토사를 백양산 백양사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팔원선사의 법호도 환양(喚羊)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백양사라는 이름이 크게 알려진 것은 고종 이후 만암선사가 절을 중흥시키면서의 일이다.
백양사 근처에서부터 절 뒤의 백학봉 서쪽 기슭까지는 사철 푸른 비자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이곳은 비자나무 분포 북한지대로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흔히 내장사 부근의 단풍을 전국에서 제일가는 것으로 쳐서 봄에는 백양사요 가을에는 내장사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새파란 비자림으로 뒷받침된 백양사의 단풍도 만만치는 않아서, 양으로 보면 내장사이지만 질로 보면 백양사라는 사람도 있다.
백양사 뒤 계곡을 따라 3.5㎞ 가량 올라간 곳에 자리잡은 운문암은 백양사 수도처 가운데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터를 잡았다. 뿐만 아니라 고려 때 각진국사가 창건했고 진묵대사의 행적이 얽혀 있으며 백파선사가 머물기도 하는 등 내력으로 보아도 백양사에 딸린 여러 암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다른 여러 암자와 함께 완전히 타서 없어졌다. 그후 1981년에 새로 암자 건물이 들어섰다. 운문암 뒤의 상왕봉에 오르면 백암산과 연이은 내장산의 연봉, 들쭉날쭉한 암봉의 장관, 그리고 멀리 무등산까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일제 때 31본산의 하나였던 백양사는 지금은 조계종 18교구의 본사로서 26개소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에 있다. 백양사IC에서 1번 국도를 타고 장성 쪽으로 8.5㎞ 가면 북하면 소재지에 닿는다. 장성읍에서 1번 국도를 따라 정읍 쪽으로 19.6㎞ 가도 역시 북하 면소재지에 이른다.
이곳에서 891번 지방도를 따라 복흥 쪽으로 조금 가면 왼쪽에 백양주유소가 나오는데, 주유소 맞은편으로 난 길을 따라 4㎞ 정도 가면 백양사에 닿는다.
길 곳곳에 백양사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어 찾아가기 쉽다. 백양사에는 군내버스가 자주 다니며, 광주에서 백양사(장성 경유)까지도 하루 14회 버스가 다닌다.
절 입구에는 숙식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평시에는 숙식에 불편함이 없으나 단풍철이면 무척 붐빈다.
알찬 답사, 즐거운 여행을 도와주는 유익한 정보
① 백암산(내장산)은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가을 단풍뿐만 아니라 새순이 돋아나는 봄경치도 뛰어나다.
백양사→운문암→상왕봉→백학봉→백양사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총길이 7.3㎞(3시간 30분)로 가벼운 하루 산행을 즐기기에 적당하다.
② 백암산 기슭의 남창계곡은 크고 작은 폭포와 기암절벽, 울창한 숲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이 어우러져 백양사 일대와는 또 다른 비경을 보여 준다.
남창계곡은 백양사IC에서 1번 국도를 따라 백양사 쪽으로 가다 보면 장성호 못 미쳐 왼쪽으로 ‘내장산국립공원 남창지구’라는 안내판이 보이고 길이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3㎞ 들어가면 계곡 입구 주차장에 닿는다. 민박 외 별다른 숙식시설은 없다.
③ 백양사에서 1번 국도를 따라 장성으로 가다 보면 북하면 월성리가 나온다. 순박하고 넉넉한 인심 속에서 편히 쉬어 갈 수 있는 시골마을로 곶감이 많이 나기로 유명하다.
장성읍에서 월성리까지는 매시간마다 군내버스가 있다. 북하 면사무소나 이장 김도금 씨 댁에 민박에 대한 문의를 할 수 있다.
대웅전
송만암 선사가 중창할 때, 그러니까 1917년에 지어진 법당이다. 법당 뒤로 보이는 깎아지른 흰 바위벼랑은 학이 날개를 편 듯하다 하여 학바위(높이 630m)라 불린다. 계절에 따라, 또 하루에도 햇살을 받는 각도에 따라 은빛이나 회백색으로 빛나는 이 바위는 백양사 경내를 한결 훤하게 해준다.
학바위를 뒤로 하고 남쪽을 향해 앉은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 집으로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장대석으로 쌓은 2단의 기단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전면의 기둥 간격이 모두 같은 것이 특색이다. 지어진 연대에 비해 전통적 건축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지만 지붕골이 좀 짧은 듯하고 공포도 섬약하여 규모에 걸맞은 권위와 위엄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흥미를 끄는 것은 내부의 광경이다. 법당이 대웅전이니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거느린 석가모니불이 좌정한 것은 당연하지만, 서쪽 벽면을 따라 단이 마련되어 있고 그 위에 자그마한 나한상들이 조로록 앉아 응진전을 차리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16나한상은 1925년에 만들어졌고, 그 옆에 놓인 6구의 나한상은 모습이나 기법에서 훨씬 더 오래 되어 보인다. 1928년에 화순 쌍봉사에서 더 모시지 못할 형편이 되어 석조·소조·목조 나한좌상 473구를 비롯하여 사자상(使者像)과 수문장상 등 모두 478구를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그 가운데 일부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무뚝뚝하거나 미소짓거나 덤덤한 제각각의 표정과 자세, 하나하나 모습이 다른 나한상들에서는 각각의 성격과 목소리까지 읽고 들어 낼 수 있을 듯한데, 나머지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고 섭섭하다.
천장 닫집 주위에는 조그만 청룡, 황룡, 비천, 청학과 백학을 탄 선인들이 날고, 사슴과 봉황 등이 모빌처럼 앙증맞게 매달려 있다.
이 건물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보전
지금 백양사 안에 있는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이다. 만암선사가 절을 다시 일으킬 당시, 백양사에는 이 극락보전과 기와집 및 초가집 한 채만이 남아 있을 뿐 거의 폐사와 같았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집이다. 선조 7년(1574)에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분명하지 않고, 고건축을 많이 본 분들은 영조 후기에서 정조 대에 걸친 시기의 건물일 것이라 한다. 야트막한 석조 기단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한 기둥을 세웠다. 정면 가운데 칸에는 빗살 3분합문을 달았고 양옆 칸에는 띠살 3분합문을 달았다. 집이 좀 되똑한 느낌을 주는 것은, 다포 집이면 대부분 팔작지붕이 올려지는데, 이 집은 다포 집에 맞배지붕이 올려져 있어서인 듯하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이다.
안에는 임진왜란 직후의 양식을 보이는 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고 우물천장 양쪽에는 단색 벽화가 그려져 있다.
진영각
극락보전 옆의 진영각 안에는 여환조사, 중연선사, 각진국사 등 백양사를 열고 중창한 스님들의 진영이 있다. 정면에는 단전쯤에서 두 손을 맞잡고 달마 특유의 딴청부리는 듯한 눈을 한 달마상이 있는데 퍽 잘 만들어졌다.
소요대사 부도
절 입구 천왕문에 들어서기 전 오른쪽으로, 비자나무로 둘린 자그마한 부도밭이 보인다. 백양사에서 배출하였거나 백양사에 주석했던 스님 가운데 18분의 사리와 유골을 모신 석종 모양의 부도와 비가 있는데, 그 가운데 소요(逍遙)대사 태능(太能)의 부도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요대사(1562~1649)는 담양 사람으로 13세에 불도에 입문하여 처음에 부휴당 선수(浮休堂, 善修)에게 배우다가 서산대사의 법제자가 되었고 백양사 조실로 있으면서 선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부도는 그가 입적한 1649년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1.58m의 전형적인 조선 시대 화강암 석종형 부도이다. 팔각 기단부에는 8엽 복련을 새겼고, 몸돌은 범종과 같이 아래위에 문양대를 둘렀으며, 가운데 문 모양을 조각하고 그 안에 소요당이라 음각했다. 9개의 유두가 도드라진 유곽이 네 면에 배치되었고 그 아래에는 두 마리 용의 옆모습을 뚜렷하게 새겼다. 아래 문양대에는 뱀, 용, 거북, 원숭이, 개구리, 게 등이 새겨져 있다.
박태홍은 이 사이트를 2001년 부터 운영해온 운영자이며,
또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로서,
현재 건축연구소.유토를 운영하고 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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