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맵 | 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1081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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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돌아가리라 이니스프리로 가지 얽고 진흙 발라 조그만 초가 짓고아홉 이랑 콩밭 일구어, 꿀벌 치면서...“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예이츠는 그의 고향 슬라이고 근처 호수 속의 작은 섬, 이니스프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망향가를 이렇게 부르고 있다. 이 시는 서양의 ‘귀거래사(歸去來辭)’로 불리고 있다.
“돌아가리라. 전원이 황폐해지니 어찌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중국 진나라의 도연명은 그의 나이 41세에 팽택현의 지사(知事)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심경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귀거래사는 도연명이 세속과 결별하고 은일을 결심하는 선언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노후에 사람들은 누구나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 같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하지 않았던가. 한낱 동물에 불과한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살던 언덕을 향해 머리를 두고 그곳을 그리며 죽는다고 했다.
학문을 닦은 후 조정에 출사해 유생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조선의 선비들은 나이가 들면 고향에 돌아와 속세를 잊고 유유자적하고자 했다. 만휴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 김계행(金係行 1431~1521)이 말년에 귀거래하여 경영한 정자다. 김계행은 17세에 진사가 되고 50세 되던 해 식년시에 급제하여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아갔다. 연산군 시대에 대사간에 올랐으나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그는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기 위한 그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했다. 처음에는 풍산사제에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 ‘보백당(寶白堂)’이라 하고 학생들을 모아 가르쳐 세간에서는 그를 보백선생이라 하였다. 1501년 고희를 넘긴 김계행은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일찍이 마련한 지금의 ‘보백당종택’에 정착하고, 산속 계곡 폭포 위에 만휴정을 지어 산수를 즐겼다.
만휴정(晩休亭)이란 “늦은(晩) 나이에 쉰다(休)”는 뜻으로 김계행이 말년에 얻은 정자의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는 이름이다. 만휴정은 김계행의 장인 김전이 지어 처음에는 쌍청헌(雙淸軒)이라는 당호로 불리었다고 한다. 김계행이 말년의 늦은 나이에 이곳을 은거생활의 장소로 즐겨 사용한 것에서 정자의 이름이 만휴정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김계행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지향하고자 했던 삶의 전형을 보여 준 올곧고 강직한 선비였다. 그는 자손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지는 못했으나 청렴을 제일로 하는 청백리의 정신을 유산으로 남겼다. “나의 집에는 보물이 없다(吾家無寶物). 오로지 보물이란 청백뿐이다(寶物惟淸白).” 이토록 청렴하고 결백한 그의 삶에 대한 정신은 자신의 호이자 종택의 당호인 ‘보백당(寶白堂)’의 의미를 담은 시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만휴정원림은 독서와 사색을 위한 정원이다. 묵계리에서 길안천에 놓인 하리교를 건너 길안천 지류를 따라 올라가면 송암계곡에 다다른다. 송암계곡을 오르면 먼저 암벽의 단애위로 흰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송암폭포의 시원한 모습이 보이며, 폭포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암반 위를 흐르는 물길로부터 조금 안쪽으로 움푹 패여 들어간 곳에 만휴정이 자리하고 있다. 만휴정은 이 계류를 건너야 들어갈 수 있는데 마치 외나무다리와 같이 폭이 좁은 다리로만 건너게 되어 있다. 다리 건너편으로 보이는 만휴정은 석축 위 끝단에 가로 세운 낮은 담장 안쪽으로 우뚝히 자리하고 있다. 만휴정의 마루에 오르면 계자난간 앞으로 맑은 물이 흘러가는 계곡이 내려다보이며, 고개를 들면 앞산의 산허리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머무르게 된다. 또 위쪽으로는 암반 위를 흘러 내려 이룬 소와 계류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고졸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래 쪽 소의 큰 바위 위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란 각자가 새겨져 있다.
만휴정은 인공적인 원림요소가 극히 절제된 구성을 지니고 있는 원림이다. 만휴정을 짓기 위해 축조한 석축과 담장, 소박한 정자,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인공원림요소의 모두이다. 본래 우리나라 고정원의 한 종류를 이루고 있는 원림은 담장 으로 경계를 구획하여 인공적으로 조성한 일본의 정원이나 과장된 모습의 중국의 민가정원과는 완전히 다른 형식을 지니고 있는 고정원이다. 정자와 같은 간소한 건물을 비롯하여 최소한의 인공적 원림요소를 자연 속에 자리하게 하여, 그 주변을 두르고 있는 다양한 자연요소를 모두 정원의 소재로 차용해서 정원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우리 고유의 원림이라 할 수 있다. 만휴정 원림은 이러한 한국 고유의 소박한 원림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는 고정원이다.
만휴정에서 귀거래의 늦은 삶을 여유롭게 보낸 김계행은 천수라 할 만한 91세까지 살았다. 그는 자신의 처소인 보백당에서 임종하면서 “대대로 청백한 삶을 살며, 항상 돈독한 우애와 지극한 효심을 갖도록 하고, 절대로 세상의 헛된 명예를 얻으려 하지 마라”는 청백리의 삶을 후손에게 유지로 남겼다. 1706년(숙종32) 안동지방의 유림들은 보백당 김계행과 응계 옥고(玉沽)의 학문과 청백리정신을 높이 기려 묵계서원을 짓고 이들을 주향자로 향사하였다.
[출처] 226. 귀거래의 정원, 만휴정원림|작성자 새오늘
박태홍은 이 사이트를 2001년 부터 운영해온 운영자이며,
또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로서,
현재 건축연구소.유토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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