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맵 |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46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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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송정(越松亭)은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바닷가에 있으며 관동팔경의 하나다. 월송정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네 화랑인 영랑ㆍ술랑ㆍ남석랑ㆍ안상랑이 울창한 소나무 숲의 경치가 빼어난 줄 모르고 지나쳤기 때문에 월송정이라 지어졌다고도 하고, 중국 월나라의 산에 난 소나무를 배에 싣고 와서 심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비가 갠 후 떠오른 맑은 달빛이 소나무 그늘에 비칠 때 가장 아름다운 풍취를 보여준다는 월송정이 처음 세워진 고려 때는 경치를 감상하는 정자가 아니라 왜구의 침입을 살피는 망루로서의 역할이 컸다.
그 후 왜구의 침입이 잠잠해진 조선 중기 중종 때 반정공신으로 활약했던 박원종이 강원도관찰사로 와서 이곳을 정자로 중건하였다. 월송정은 그 뒤부터 관동팔경 중의 하나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한껏 받았는데, 『여지도서』에는 월송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월송정은 동쪽 모래언덕에 만든 조산(造山)이다. 신라 때 학사(學士) 황낙과 장군 구대림이 중국에서 건너와 월송정 아래로 왔다. 구대림은 해당화가 핀 해안 북쪽 포구에 살았다. 그런 까닭에 그 포구의 이름을 구미포(丘美浦)라고 하였다. 황낙은 북쪽 산 들판에 살았는데, 동쪽 모래언덕에 인공으로 조산을 만들어 풍수상의 결점을 보완하였다. 우리나라 성씨 황씨의 시조는 이 사람이다. 조산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월송정
월송정고려 때 처음 세워질 당시에는 왜구의 침입을 살피는 망루로서의 역할이 컸다. 비가 갠 후 떠오른 맑은 달빛이 소나무 그늘에 비칠 때 가장 아름다운 풍취를 보여준다.
조선시대의 성종은 화가에게 명하여 조선 팔도의 시정 가운데 가장 경치 좋은 곳들을 그려서 올리라 하였다. 그때 화가가 함경도 영흥의 용흥각과 이곳을 그려 올리자 용흥각의 버들과 부용이 좋기는 하나 경치로는 월송정만 못하다고 하였으며, 숙종ㆍ정조도 이곳을 돌아보고 시를 지어 아름다운 경치를 찬양하였다고 한다. 그 뒤로도 안축, 이곡 등이 월송정의 경치를 칭찬하였고, 조선 선조 때 동인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냈고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한음 이덕형의 장인이었던 이산해가 유배를 와서 다음과 같은 기문을 지었다.
월송정은 군청소재지의 동쪽 6~7리에 있다. 그 이름에 대해 어떤 사람은 “신선이 솔숲을 날아서 넘는다[비선월송(飛仙越松)]라는 뜻을 취한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월(月) 자를 월(越) 자로 쓴 것으로 성음이 같은 데서 생긴 착오”라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월(月) 자를 버리고 월(越) 자를 취한 것은 이 정자의 편액을 따른 것이다.
푸른 덮개 흰 비늘의 솔이 우뚝우뚝 높이 치솟아 해안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몇만 그루나 되는지 모르는데, 그 빽빽함이 참빗과 같고 그 곧기가 먹줄과 같아 고개를 젖히면 하늘의 해가 보이지 않고, 다만 보이느니 나무 아래 곱게 깔린 은 부스러기, 옥가루와 같은 모래뿐이다.
정자 아래에는 한 줄기 물이 흘러 바다 어귀와 통하며, 물 사이로 동쪽에는 모래언덕이 휘감아 돌아 마치 멧부리와 같은 모양이다. 언덕에는 모두 해당화와 동청초(冬靑草, 겨우살이)뿐이며 그 밖은 바다다.
아아, 이 정자가 세워진 이래로 이곳을 왕래한 길손이 그 얼마이며, 이곳을 유람한 문사(文士)가 그 얼마랴. 그중에는 기생을 끼고 가무를 즐기면서 술에 취했던 이들도 있고, 붓을 잡고 목을 놀려 경물(景物)을 대하고 비장하게 시를 읊조리며 떠날 줄 몰랐던 이들도 있을 것이며, 호산(湖山)의 즐거움에 자적했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강호(江湖)의 근심에 애태웠던 이들도 있을 것이니, 즐거워한 이도 한둘이 아니요, 근심한 이도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나 같은 자는 이들 중 어디에 속하는가? 왕래하고 유람하는 길손도 문사도 아니며, 바로 한 정자의 운연(雲煙)과 풍월을 독차지하여 주인이 된 자다. 나를 주인으로 임명해준 이는 누구인가? 하늘이며 조물주다.
천지간에 만물은 크든 작든 저마다 분수가 있어 생겼다 사라지고 찼다가 기우는 법, 이는 일월과 귀신도 면할 수가 없는 것인데, 하물며 산천이며, 하물며, 하물며 사람일까 보냐. 이 정자가 서 있는 곳이 당초에는 못이었는지 골짜기였는지 바다였는지 뭍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거니와, 종내에는 또 어떠한 곳이 될까? 또한 솔을 심은 사람은 누구며, 솔을 기른 사람은 누구며, 그리고 훗날 솔에 도끼를 댈 이는 누구일까? 아니면 솔이 도끼를 맞기 전에 이 일대의 모래언덕과 함께 흔적 없이 사라져버릴 것인가? 내 작디작은 일신(一身)은 흡사 천지 사이의 하루살이요, 창해에 뜬 좁쌀 한 통 격이니, 이 정자를 좋아하고 아끼어 손[객(客)]이 되고 주인이 되는 날이 그 얼마인지 알 수 없거니와, 정자와 시종과 성쇠는 마땅히 조물주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월송정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솔숲 위로 멀리 바닷물이 넘실거리는데 이러한 월송정의 빼어난 풍광을 겸재 정선은 화폭에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월송정 앞에 은빛 모래가 깔린 모래밭과 그 너머 동해의 쪽빛 바다 그리고 모래밭 주변에 펼쳐진 1만여 그루의 소나무들이 어우러져 선경을 이루었으나, 울창했던 송림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베어내어 황폐해지고 말았다. 그 뒤 1956년 월송리마을에 사는 손치후라는 사람이 사방관리소의 도움을 받아 해송 1만 5000그루를 다시 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동팔경 답사를 마친 후 월송정에서 막걸리 한 잔을 기울이며 소나무 너머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면 정철의 『관동별곡』처럼 신선으로 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나무 숲 너머로 달이 떠오르고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2012.10.5, 다음생각)
박태홍은 이 사이트를 2001년 부터 운영해온 운영자이며,
또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로서,
현재 건축연구소.유토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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