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맵 | 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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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에 자리한 직지사는 선산의 도리사와 함께 아도화상이 창건하였으니 신라 눌지왕 2년(418년)의 일이다. 이때는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처음 창건하였을 때는 지금처럼 큰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절 이름에서 나타나듯 직지사는 선종사찰이다. 불교의 종파는 크게 나누어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지고 교종은 불교의경전에 의지해 깨달음을 구하는 종파이고 선종은 참선에 의지해 부처를 이루려는 종파이다. 선종 집안의 가풍은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바로 마음을 가르쳐 본래의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는 것으로 여기에서 ‘직지’ 두 글자를 따서 사찰로 삼은 것이다.
직지사는 창건된 이후 신라 선덕여왕 14년(645년) 자장스님에 의해서, 그리고 경순왕 4년(930년) 천묵대사에 의해서 중창된 기록이 있고 그 후 능여대사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도움을 주게 되면서 태조 19년(936년)에 사세를 더욱 키우게 된다.
신라 경애왕 4년(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서라벌을 기습하여 경애왕을 죽이자 왕건은 신라를 구원하러 내려갔다가 팔공산전투에서 신숭겸·김락 장군을 잃고 자신도 겨우 목숨을 건져 도주하게 된다. 이 때 직지사에 있던 능여대사의 도움을 받게 되고 장차 말띠 해에 큰 일이 이루어진다는 예언을 얻게 되는데 역시 그 말대고 말띠 해인 934년부터 후백제를 제압하고 통일을 이루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줄곧 큰 사세를 유지하던 직지사가 약화되기 시작한 것은 역시 조선시대 들어와 임진왜란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는 2대왕인 정종의 태를 묻은 태봉이 대웅전 뒷봉우리에 모셔지는 인연으로 수호사찰로 지정되면서 예전의 규모를 지탱해 나갔는데 임진왜란을 맞아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직지사는 일본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힌 승군의 지도자 사명당의 출가사찰이고 그가 30세 때에는 이 절의 주지를 하기도 했다. 왜군은 이런 이유로 혹독한 보복을 가해 대웅전 앞에 있던 5층 목탑을 비롯해 40동의 건물이 불타고 모든 유물들이 유실돼 버렸다.
상탑을 거느린 직지사 대웅전은 임진왜란이 지난 선조 35년(1602년)에 새로 지었고 영조 11년(1735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대웅전 안에는 1735년 중건 당시의 벽화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용을 탄 관세음보살, 구름을 탄 신선, 문수동자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세 분 불상 뒤에는 길이가 6m가 넘는 세 점의 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는데 영조 20년(1744년)에 그린 것이다. 비단 바탕에 적색·녹색·황색을 주로 사용하여 차분하고 안정감이 있는 배색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세부묘사도 아주 치밀하여 영·정조시대의 대표적 걸작임을 알 수 있다. 보물 제670호이다.
세 분 부처님이 앉아있는 수미단은 ‘순치 8년 신묘 4월’이라는 먹으로 쓴 한문글씨가 남아있어 이진왜란 후인 1602년에 중창된 후 1651년에 수미단을 다시 손댔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1735년에 다시 중건된 기록이 뚜렷함으로 수미단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런 점은 수미단 조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수미단은 정면의 폭이 10m가 넘는 장방형으로 옆면은 2m 가량 된다. 하대·중대·상대의 3단구도에 다시 보단을 따로 설치하였는데 적색·청색·녹색을 주로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밝은 느낌을 주고 있다.
하대는 아무런 조각이 없이 궁글린 하대목 4개를 서로 연결하여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였는데 족대의 배치나 족대 사이의 용조각 등이 없어 밋밋해 보인다. 그러나 하대목의높이가 33cm이고 두께도 알맞아 매우 튼실해 보인다.
중대는 3단으로 구성하였는데 반원형 띠살 같은 가는 나무로 단을 나누고 각 단도 역시 그런 나무로 여러 칸을 나누었다. 거기에 바깥쪽으로 다시 둥근 기둥을 양쪽 끝에 세우고 대나무 마디처럼 깍은 작은 나무 기둥들을 안쪽으로 2개씩 4개를 세웠다. 중앙에 있는 2개의 기둥을 자세히 보면 용이 일어서 있는 모습으로 기둥을 조각해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곧 용머리를 부처님 쪽으로 두고 등을 바깥쪽으로 향한 모습을 일직선 기둥으로 하여 세움으로서 부처님을 지키는 호위의 역할과 불법을 향한 마음을 함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중대 하단에는 수중생물들이 연꽃 속에 숨거나 나타나며 조각돼 있다. 특이하게도 쏘가리와 조개가 보이는데 이는 다른 사찰의 수미단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쏘가리는 한문으로 ‘궐어’라 부르며 우리나라 하천의 맑은 물에 살면서 작은 물고기나 새우 등을 잡아먹는다. 궐어의 ‘궐’이 궁궐의 ‘궐’과 음이 같아서 쏘가리 그림은 과거에 급제하여 대궐에 들어가 벼슬살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의 민물고기 종에서는 가장 힘이 좋은 종류여서 수중의 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수미단에는 동물의 왕인 사자, 꽃의 왕인 모란과 함께 나타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조개는 수중생물이지만 잉어처럼 자손창성의 의미로도 써 왔다. 이는 화재로부터 법당을 보호하고 신도들의 자손창성을 기원하는 의미를 함께 포함한 것이다.
중대 하단 오른쪽 끝에서부터 2째칸에는 연꽃 위에 파랑새가 조각돼 있다. 이 파랑새는 원효대사와 관계가 있으니 「삼국유사」에 이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동해안 양양 땅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낙산사를 창건하게 된다. 그 후 원효대사도 이곳에 관세음보살을 참배하러 오는 도중에 산 밑에서 흰 옷 입은 여인과 말을 주고받게 된다. 다시 길을 가다가 빨래하는 여인과도 문답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원효스님에게 ‘가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고는 갑자기 숨어 버린다. 원효대사는 그 소나무 아래에서 신 한 짝을 보았는데 낙산사 관음보살상의 자리 앞에 똑같은 신 한 짝이 있어 앞의 여인들이 관세음보살이 나타난 것임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파랑새는 관세음보살을 보기 위해 지성으로 기도하는 이에게 나타나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지게 된다. 곧 좋은 징조를 알리는 상징으로 쓰게 되고 자연히 수미단에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중대의 중단부분에는 땅 위의 세계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연꽃과 모란 사이에 나타나고 있다. 왼쪽부터 첫째 칸에는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이 새겨져 있다. 용이 수미산 밑의 구름 사이로 여의주를 쫓으며 솟아오르고 큼직한 바위들로 둘러싸인 도리천에는 탑과 건물들이 숲속과 바위 밑에 배치돼있다. 도리천 위로는 바로 허공중에 설치된 하늘세계이므로 중대 상단은 용만 배치하게 된다. 이 중단 부에는 나비와 잠자리도 나타나고 이는 불교의 최종목표인 해탈과도 관계가 있다. 나비나 잠자리나 애벌레 기간을 거친 후 번데기가 되고 다시 날개가 달린 성충이 되어 날아다니게 되는데 이를 불교의 수행에 빗대어 자유로운 해탈을 얻은 중생으로 표현해왔기 때문이다. 곧 모든 중생들도 올바른 수행을 통해 자유로운 해탈을 맛볼 수 있다는 상징성을 번데기에서 나비나 잠자리가 나온 것으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중대 중단 오른쪽 끝에는 희한한 조각이 하나 있다. 푸른색의 병의 입구로는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물을 따르는 주둥이로는 용의 몸이 빠져나오고 있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동화적인 풍경인데 이 조각의 정체는 분명하지가 않다.
우선 선가의 화두 중에 ‘병 안의 새를 꺼내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화두는 일종의 문제인데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는 문답을 말하며 이를 참선하는 수행자가 항상 염두에 두고 궁구하는 것을 ‘화두를 든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부처님은 항상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부처님의 성품)이 있다’라고 말했는데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스님은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말씀과 어긋남으로 수행자는 이 화두를 잡고 앉아 본질을 꿰뚫으려고 하고 이 문제를 완전히 극복한 것을 ‘화두를 타파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화두들이 1700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앞에 말한 ‘병 안의 새’이다. 병을 깨지 않고 어떻게 새를 꺼낼 것인가? 병 안에 있는 것이 새이든 용이든 상관없이 이 화두를 타파한 내용이 바로 병에서 나오는 용 조각이 아닌가 생각된다. 곧 중생이 자기의 본래성품이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는 깨침의 순간을 병에서 나오는 구름과 용, 그래서 걸림없이 날아다니는 용으로 나타낸 것으로 믿어진다.
중대 상단은 구름 속에서 천변만화하는 용의 모습을 담았다. 용을 정면에서 본 모습으로 새기기도 하고 측면 모습으로 새기기도 하였다. 이는 수미산 정상 도리천 위의 하늘세계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다시 그 위에 부처님의 세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중대의 정면 조각은 밑에서부터 수중세계, 지상세계, 하늘세계로 나누고 거기에 맞는 생물들을 배치하고 그 위에 다시 부처님을 모신 형태로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의 세계관을 축소해서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
수미단 좌측면과 우측면은 중대 부분에 양쪽 끝으로 세로로 나눈 칸을 두고 가운데 공간을 3단으로 나누었다. 정면에 나타난 생물들이 연꽃과 모란 사이에 배치돼 있다. 부처님 좌대 밑에 가리개 겸 꾸미개로 설치된 보단에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의미로 여러 가지 꽃이 어울려 조각되었고 중앙에는 부처님과 법당 수호의 역할로 용을 모시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천 직지사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불교 목공예의 정수 수미단), 2006, 한국콘텐츠진흥원)
박태홍은 이 사이트를 2001년 부터 운영해온 운영자이며,
또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로서,
현재 건축연구소.유토를 운영하고 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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