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맵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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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이 절은 426년(구이신왕 7) 신라의 정관존자(淨觀尊者)가 창건하여 만일암이라 하였고, 508년 이름을 전하지 않은 선행비구(善行比丘)가 중건하였다는 <만일암고기>의 기록과 514년(법흥왕 1)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 하는 <죽미기>의 기록이 있다.
또 895년(헌강왕 11) 도선(道詵)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500사찰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상소하였는데, 대흥사도 그 중의 하나라는 설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그러나 ≪대둔사지≫의 자료를 모았던 혜장(惠藏)은 이들 기록이 창건자의 활동시기로 볼 때 모두 신빙성이 없다고 보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의 앞마당에 신암(信菴)·사은(思隱)·성유(性柔) 등 세 승려의 부도(浮屠)가 있었다고 했는데, 이들의 행적이 알려진 바는 없으나 고려시대 승려이므로 대흥사가 고려 이전에 창건된 것은 확실하므로, 혜장이 주장한 신라 말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에는 아직 대규모 사찰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였다.
이 절이 크게 중창된 것은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대흥사를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요, 만세토록 파괴됨이 없는 곳이며, 종통의 소귀처(三災不入之處 萬歲不毁之處 宗統所歸之處)’라고 보고 자신의 의발(衣鉢)을 대둔산에 전할 것을 부촉(咐囑)한 임진왜란 뒤의 일이다. 1607년(선조 40) 해남의 외딴 곳에 의발을 전한 서산대사의 배려에 의해서 이 절은 배불(排佛)의 강압 속에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그 뒤 1665년(현종 6) 심수(心粹)가 대웅전을 중창하였고, 1669년(현종 10)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였으며, 1811년(순조 11) 천불전이 불타자 1813년 완호(玩虎)와 제성(濟醒)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흥사는 배불의 그늘 속에서 수많은 강사와 종사를 배출하였다.
그 대표적인 고승은 13대종사(大宗師)와 13대강사(大講師)이다. 13대종사를 출생순으로 열거하면, 해동화엄종의 중흥조로 존경받았던 의심(義諶), 담론(談論)을 잘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했던 삼우(三遇), 화엄(華嚴)의 도리와 백가(百家)에 통달했던 도안(道安), 육신보살(肉身菩薩)로 칭송받았던 문신(文信), 계행(戒行)을 청정하게 가졌던 추붕(秋鵬), 전국을 순방하며 화엄대회를 열었던 지안(志安)이 있다.
그리고 그 학문이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대우(大愚), 검소와 청빈의 생활로 평생을 살았던 회정(懷淨), 문자를 떠난 곳의 진리를 설파하여 마음의 근원을 찾도록 가르쳤던 새봉(璽封), 대흥사의 정진당(精進堂)에서 늘 화엄법회를 열었던 체정(體淨), 인욕행이 남달리 뛰어났던 해원(海源), 대승경전에 통달하여 많은 저술을 후세에 남겼던 유일(有一),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이름난 의순(意恂) 등이다.
13대강사들은 모두가 제10대 대종사였던 체정의 문도로 원오(圓悟)·광열(廣悅)·영우(永愚)·승제(勝濟)·성규(聖奎)·정일(鼎馹)·태관(泰瓘)·행인(幸仁)·복혜(福慧)·윤우(尹佑)·시연(示演)·혜장(惠藏)·각안(覺岸) 등이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대흥사의 옛모습은 남원(南院)과 북원(北院)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북원은 대웅보전·나한전·시왕전(十王殿) 등 24개 소의 당우가 있었고, 남원은 극락전·대장전(大藏殿)·지장전 등 12개 소의 당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문제점이 있다. 대흥사의 현재의 사역(寺域)은 북원보다 남원이 훨씬 넓은데도 좁은 북원 쪽에 더 많은 당우가 집중적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의 대흥사는 사지(寺址)의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金塘川)의 냇물을 중심으로 가람이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고, 지금도 남원·북원이라고 한다. 또, 남원·북원의 법당들은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닌 별원(別院)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북원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군(一群)과 남원의 중앙부에 있는 천불전과 서산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한 일곽, 다도로 유명한 초의(草衣)가 중건했던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심으로 한 일곽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웅보전은 심수가 1665년(현종 6) 봄에 중건을 시작하여 1667년 가을에 완성한 건물로 전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이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인 이광사(李匡師)가 쓴 것이며, 내부에는 조선 후기에 만든 목조삼존불과 광무연간에 조성된 후불탱화(後佛幀畫)를 비롯해서 감로탱화·삼장탱화·신중탱화·칠성탱화가 있다. 대웅전 앞에는 침계루(枕溪樓)가 냇가에 연이어 있고, 좌우에는 백설당(白雪堂)·세진당(洗塵堂)의 승사(僧舍)가 있다.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의 편액이 있으며, 이 건물은 현재 큰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웅보전 동편에는 응진전(應眞殿)이 있으며, 안에는 석가여래삼존불을 중심으로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응진전 앞에는 보물 제320호인 응진전전삼층석탑(應眞殿前三層石塔) 1기가 있다. 전하는 말로는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사리탑이라고 한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인 천불전은 1811년(순조 11) 불탄 뒤 1813년에 중건한 것으로, 내부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천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천불상은 옥돌로 만든 것으로, 완호 등 10인이 6년에 걸쳐 경주 옥돌로 조성하였다. 천불이 완성된 뒤 해로를 통하여 이 절로 옮기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일본에 닿게 되었으나, 일본인들의 꿈에 이 천불이 나타나서 ‘우리는 지금 조선국 해남의 대둔사로 가는 중’이라 하여 다시 대흥사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천불전 좌우에는 불경을 배우는 학승들이 기거하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인 용화당(龍華堂)과 강사가 기거하는 건물이 있으며, 정면에는 가허루(駕虛樓)가 있다.
표충사는 대흥사의 사격(寺格)을 말해 주는 대표적인 건물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하여 공훈을 세웠던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四溟)과 처영(處英)의 영정을 봉안했으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충사 일원의 당우 배치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표충비각(表忠碑閣)과 조사전(祖師殿), 정면에 삼문(三門), 삼문 밖에는 2층 누각인 의중당(義重堂)과 앞쪽으로 중문인 예제문(禮齊門)과 정문인 호국문(護國門)이 있다. 또, 의중당의 동쪽에는 서산대사의 유품을 비롯하여 절의 유물(遺物)을 보관하는 서산대사유물관이 있다. 표충사의 건물은 1789년(정조 13)에 건립되었고,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며, 정면 3칸의 맞배집이다.
의중당은 당시 6군의 군수가 봄·가을로 표충사에 제사지낼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차리던 곳으로 전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다. 서산대사유물관에는 선조의 하사품인 옥발(玉鉢)·비취옥발(翡翠玉鉢)·수저·금란가사(金襴袈娑)·금자병풍(金字屛風)과 표충사총섭사령패, 서산대사의 친필·교지·신발, 초의가 그린 관음도, 대광명전상량문, 승군단(僧軍團) 표지물, 철제 방패, 금과 은으로 쓴 불경, 금동불상 등 총 24종의 유물이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인 대광명전은 표충사 동쪽 300m 지점에 있으며, 조선 후기 초의가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이 지역을 동국선원(東國禪院)이라고 부른다.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석가불의 삼신불을 봉안하였고 ‘井’자의 천장에는 연화문과 운학(雲鶴)을 그렸다. 이 연화문과 운학 문양은 그 색채뿐 아니라 문양 자체가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뛰어난 작품이다. 전하는 말로는 초의가 직접 단청을 하였다고 한다.
대광명전 옆에는 고승들의 영정을 봉안한 전면 8칸의 보련각(寶蓮閣)과 요사채가 있다. 이 밖에도 대흥사 역대 고승들의 부도와 비석을 봉안한 비전(碑殿)이 있다. 이 비전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인 서산대사 부도를 비롯하여 대흥사 13대종사와 13대강사 등의 부도 및 비가 있다.
박태홍은 이 사이트를 2001년 부터 운영해온 운영자이며,
또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로서,
현재 건축연구소.유토를 운영하고 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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