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맵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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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67호로 지정된 녹우단은 해남윤씨 일가의 종택과 사당 등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녹우당(錄雨堂)은 고산 윤선도(尹善道)가 살았던 사랑채를 일컫는데, 지금은 해남윤씨 종가 전체를 녹우당이라 부른다. 윤선도의 4대 조부인 어초은(漁樵隱) 효정(孝貞. 1476~1543)이 백련동(現 연동)에 터를 정하면서 15세기 중엽에 지은 건물로, 녹우당이란 이름의 유래는‘집 뒤 산자락에 우거진 비자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쏴하며 푸른 비가 내리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녹우단은 덕음산을 주산으로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고 명당자리 중 하나로 유명하다. 덕음산을 뒤로 그 줄기인 성매산/옥녀봉/호산을 잇고 있어 흔히 풍수지리의 산서(山書)에서 말하는 현무/청룡/백호/주작이 잘 짜여진 명당자리로 손꼽힌다.
해남윤씨는 세 곳의 중심영역이 있다. 첫 번째는 해남 윤씨가 처음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된 강진군 도암면 강정리 덕정동이다. 해남윤씨 는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곳은 백련동 녹우당에 터를 닦은 어초은 윤효정이 태어나고 그의 아버지 윤경(尹耕)을 비롯해 조부인 윤사보(尹思甫)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두 번째로는 해남윤씨의 윗대 선조들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시조 윤존부(尹存富)를 비롯하여 7세 윤록화(尹祿和), 중시조인 윤광전 (尹光琠)과 그의 아들인 윤단봉(尹丹鳳), 윤단학(尹丹鶴)의 산소가 있는 강진군 도암면 계라리 한천동이다.
마지막으로 윤효정이 해남으로 장가들어 자리를 잡고 해남윤씨가를 번성시킨 곳이 백련동, 지금의 연동이다. 고산의 5대조인 윤경은 7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막내인 윤효정이 해남읍 백련동에서 크게 가업을 이루고 어초은공파를 형성하였으며 이후 해남윤씨가 번창하게 되었다.
어초은 선생이 해남윤씨를 이 지역의 명문집안을 성장시키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경위는 당시 해남에서 가장 큰 기반을 가지고 있던 대부호이자 향족(鄕族)인 초계정씨(당시 해남정씨)의 사위가 되어 경제적 기반 확보를 이룰 수 있었다. 이후 자손이 영주할 새터를 잡고 가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초은선생은 해남을 학문의 길로 이끌었다는 금남 최부선생으로부터 수학하였다. 윤구(尹衢), 윤행(尹行), 윤복(尹復) 세 아들을 문과에 급제 시키게 되며 해남윤씨가를 명문사족으로 자리 잡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국문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단가 문학의 최고봉인 고산 윤선도를 배출하였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1626~1694)는 현재 심사정, 겸재 정선과 함께 조선 후기 삼재(三齋)중 한명으로 문인화가로 이름이 높았다. 국보인 ‘자화상’을 그렸으며, 아들 낙서 윤덕희와 손자 총고 윤용의 3대에까지 그 예술적 재능이 이어졌다.
녹우당은 조선후기 공재 윤두서의 학문과 예술의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 소치 허유 등 쟁쟁한 학자와 문인 예술가들이 머물거나 교류한 곳이 되어 해남의 유교 문화와 문화 예술의 중심공간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박태홍은 이 사이트를 2001년 부터 운영해온 운영자이며,
또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로서,
현재 건축연구소.유토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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