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맵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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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운조루(雲鳥樓)가 있다. 이곳에 낙안부사를 지냈던 안동출신의 유이주가 99칸 집을 지었다. 운조루라고 불리는 사랑채를 비롯한 이 집은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는데, 운조루가 자리한 터는 『조선의 풍수』를 지은 일본의 풍수지리학자 무라야마 지준의 글에도 소개될 만큼 널리 알려진 명당이다.
운조루 입구에 있는 표지판에 따르면, 오미리마을은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금환낙지(金環落地)의 형상이다. 이런 곳을 찾아 집을 지으면 자손 대대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 몇백 년 전부터 전해 내려왔다. 명성이 자자하여 이곳이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곳에는 위쪽에 금거북이 진흙 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의 금구몰니(金龜沒泥), 중간에 금환낙지, 아래쪽에 다섯가지 보석이 모여 있는 형상의 오보교취(五寶交聚)의 명당이 있다.
중간 지대의 명당 금환낙지는 운조루가 이미 차지했지만, 금환낙지와 오보교취의 명당을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가 호구조사를 실시한 통계에 따르면 1918년 70호에 350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4년 만에 148호에 744명으로 불어났다.
운조루는 1,400평의 대지에 건평 273평인 99칸(현재는 70여 칸) 저택으로, 문중 문서에 따르면 한때는 883마지기의 농토가 있었고 대한제국 말에만 해도 농사를 짓기 위해 한 해에 2백~4백여 명의 노동력이 조달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의 위세를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저택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이 마을 일대에 집을 지었던 사람이 몇십 명에 이르렀으며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이 될 무렵에는 3백여 채가 들어섰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400여 평의 대지에 세워진 운조루(주인이 거처하였던 곳)와 손님을 맞았던 귀래정(歸來亭), 그 아랫마을 환동에 금가락지 같은 형국으로 높은 담벼락을 두른 채 대숲에 싸여있는 기와집(박 부잣집) 한 채뿐이다.
무라야마 지준은 “이 꽃이 떨어지면 모든 사람이 애석하게 되니 이 땅은 모든 사람에게 애석함을 주는 인물을 낼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한편 운조루 근처에 있는 사도리(沙圖里)는 도선국사가 어떤 기인에게 풍수지리를 배울 때 모래를 이용하여 산세도(山勢圖)를 만들어 익혔다고 해서 사도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택리지』에서 “남쪽은 구만촌이다. 임실에서 구례에 이르는 강 부근에도 이름난 구역과 경치 좋은 곳이 많고 또 큰 마을도 많으나, 그중에도 구만촌은 시냇가에 위치하여 강산과 토지와 거룻배를 통해서 얻는 생선과 소금으로 얻는 이익이 있어 살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라고 한 광의면 구만리는 돌굽이 안쪽이 되므로 구만리라고 이름 지었는데, 지금도 역시 기름진 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중환이 살 만한 곳이라고 언급했던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월곡마을은 대한제국 말의 이름난 시인이자 절개 높은 선비였던 매천 황현이 살다가 간 곳이다. 이곳에서 황현은 동학농민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기록한 『오하기문(梧下紀聞)』을 남겼다. 그 서두는 이렇다.
아아! 화변(禍變)이 온다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은 운수가 있고, 일이 막히거나 태평스러운 것도 때로는 서로 뒤바뀐다. 이것은 비록 시운(時運)이나 기화(氣化)가 한결같이 정해진 것이어서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또한 사람들 일의 잘잘못에 기인하기도 하는 것이니, 대개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형태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요, 하루아침이나 하룻저녁에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황현은 1855년 전라남도 광양군 봉장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몰락한 시골 선비 황시묵과 풍천 노씨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4~15세에 이르면서부터 붓을 잡고 글을 쓰면 바람이 일어서 사람들은 광양의 황신동(黃神童)이라고 떠들었다 한다. 그 소문은 호남 전역에 널리 퍼졌다.
행동이 단정하였고 음성이 맑았으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매천은 28세에 과거를 보고 장원으로 뽑혔으나 시골 출신이라 하여 차석이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곧바로 고향으로 되돌아온 그는 초야에 묻혀 고금의 서적이나 읽으려 했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34세에 생원회시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다.
그 무렵 기울어 가는 나라 조선은 일본의 우세한 힘 앞에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고, 조정은 대원군과 명성황후 세력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었다. 수구와 개화의 갈등, 미국ㆍ영국ㆍ청나라 등 구미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가는 가운데 갑신정변, 한성조약이 맺어졌고 영국 함선이 거문도를 점령하였다. 서울의 친구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매천이 책을 읽고 쓰는 데에만 온 정열을 다 쏟자 “나라가 위급한데도 은둔 생활만 하고 있느냐” 하며 다그쳤다. 그러나 매천은 “자네들은 어찌하여 귀신 나라 미친놈 속에 나를 끌어들여 함께 귀신이나 미친놈으로 만들려 하는가?” 하면서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이 마을을 떠나지 않았던 매천은 후세 사람들을 위해 기록한 『매천야록』, 『오하기문』 등의 저술에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조선의 실정을 낱낱이 서술하였다. 을사년 음력 10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매천은 여러 날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였으며 애국지사를 애도하는 「오애시(五哀時)」를 지었다.
경술년(1910) 8월, 조선이 국권을 빼앗기자 매천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절명시(絶命詩)」 4수와 유언으로 「유자제서(遺子弟書)」를 써서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5백 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을 당하여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너희들은 과히 슬퍼하지 마라”라는 말을 남긴 후 아편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매천 황현이 쓴 「절명시」 4수 중 세 번째 절은 다음과 같다.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니
무궁화꽃 삼천리는 이미 망해버렸네.
가을 등잔에 책을 덮고 천고의 일 생각하니
인간의 글자 아는 사람 되기 어렵구나.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시대에 책임을 지고 순절한 매천 황현의 숨결이 지리산 자락에 남아 잘못 살아가는 후세 사람들을 오늘도 질타하고 있다. 남원, 곡성, 구례는 모두 지리산 서쪽에 위치하여 경상도의 함양, 산청, 하동과 더불어 지리산 문화권으로 분류되고 있다. 구례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면 곡성(谷城)이다.
순창에서 곡성으로 넘어가는 섬진강가에는 순창 강천산과 김용택 시인이 섬진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손꼽는 장산마을, 구담마을이 있다. 순창에는 특히 입석과 돌장승이 많다.
“나무 그늘이 얽혀 있으니 달빛이 더디고, 바람이 높은 누에 지나니 네 자리가다 알맞구나. 만학(萬壑)에 뜨는 산바람은 아침 비 갠 후요, 처마에 떨어지는 산색은 석양 때로다. 경치를 유련(留連)하기에 술이 없지 않고 심정을 도야함은 시가 가장 좋도다. 가소롭다. 실행의 구기(拘忌)함이 몇 번이나 좋은 기약 막혔는고”라고 쓴 유순의 글 속에 남아 있는 곡성은 백제 때 욕내군(欲乃郡)으로 불리다 신라 때 옥과군을 합하여 곡성군이 되었다.
지금은 곡성군에 편입된 옥과현 「형승」조에 “크고 높은 산들이 억누르듯 서쪽에 자리하고, 큰 강은 제어하듯 동쪽으로 흐른다”라고 실려 있고, “땅이 비좁으나 사람은 많다. 일정한 생업 없이 살아가고 있다”라고 『여지도서』 「풍속」조에 실린 곡성의 진산은 동악산이다. 동악산 정상에 서면 멀리 지리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옥과의 설산, 광주의 무등산이 지척이다.
곡성 석곡면에는 삼베를 모시와 같이 가늘게 짜는 돌실나이가 유명하다. 석곡의 토박이 말인 ‘돌실’과 ‘나는 것’의 옛 표현인 ‘나이’를 합쳐서 돌실나이로 부르는 이곳 삼베는 궁중에 올리는 진상품이었기 때문에 다른 곳의 삼베보다 비싸게 팔려 나갔다.
“방구통통 구례장 구린내 나서 못 보고, 아이고 데고 곡성장 시끄러워서 못 보고, 뺑뺑 돌아라 돌실장 어지럼병 나서 못 본다” 하고 장돌림 사이에서 불렸던 노래 속에 나오는 ‘곡성’은 슬퍼서 엉엉 우는 곡성(哭聲)에서 비롯한 것이다.
한편 고려 때 남해안 일대로 왜구들이 자주 침입하였는데 이곳도 예외가 아니어서, 우왕 5년(1379) 3월에 왜구가 남원과 곡성으로 쳐들어와 판관을 죽이고 사흘 동안 머물다가 순천으로 쳐들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고려 말 창왕 때 왜구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죽곡면 당동리에 있던 읍치(邑治, 관청 소재지)를 동악산 아래로 옮겨왔다고 한다.
“팽택(彭澤)에 행장을 푸니 기쁘게 도령(陶令)을 만났도다. 햇볕 쪼이니 화기(花氣)가 따뜻하고, 바람이 급하니 대(竹) 소리가 차구나. 버들 언덕에 꾀꼬리가 울고, 연꽃 못에는 백로가 한가롭네. 티끌세상 밖의 경치를 깊이 찾으니 한 번 웃으며 낯빛을 펴도다”라고 고려 때의 문신 김극기가 노래한 곡성에서 옥과를 지나면 담양과 창평에 이른다.
박태홍은 이 사이트를 2001년 부터 운영해온 운영자이며,
또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로서,
현재 건축연구소.유토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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