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맵 | 전북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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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따라 난 산길에 접어드니 울창한 숲속 터널이다. 이 길은 요즈음 만든 길이 아니라 조선시대 그 이전부터 선객의 발걸음과 방문객의 수고로 만들어낸 역사의 흔적이다. 우마차도 다닐 수 없는 좁은 산길엔 그늘의 시원함과 자연의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졸졸거리는 개울물이 정답고, 여름 한철 울어대는 매미의 합창이 정겹다. 등줄기에 땀이 배어나온다. 그래도 절 오르는 길, 발걸음이 가볍다.
한참을 오르니 작은 폭포 하나가 물줄기를 쏟아낸다. 장마라고 해도 아직 장마다운 빗줄기가 내리지 않아 계곡의 물줄기가 그리 급하지 않건만 폭포되어 내리는 물줄기는 하얀 분말을 뿌리며 시원하게 쏟아져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적신다. 걸음을 멈추고 바위에 걸터앉아 계곡물에 발을 담근다. 시원한 그늘 솔바람이 금세 땀을 식힌다. 역시 피서는 탁족이 최고라는 말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 발목부터 무릎·가슴·머리까지 시원하다.
다시 절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가파른 바위길이 앞을 가로막는다. 철제 난간을 의지해 바위 고개를 오르다 아래를 바라보니 멀리 운주면 경천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아니, 이렇게 높이 올랐나 싶을 정도로 몸이 한 마리 새가 되어 허공을 날아오른다. 바위 아래 물길은 계곡 아래로 이어지고 바쁜 숨은 턱밑에 차오른다. 언제쯤 나타날까, 절은? 마음의 바람이 간절해지자 머리 위 키 큰 소나무 사이로 절이 눈에 들어온다.
통나무 개울을 건너 보라색 수국이 화사하게 핀 절 마당에 들어서니 ‘불명산화암사(佛明山華巖寺)’라는 현판이 고색창연한 누각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지금껏 땀 흘리며 올라온 계곡 위에 이런 선경이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화암사는 산중에 핀 ‘한송이 꽃’ 같은 절이었다.
화암사는 대둔산 남쪽 불명산 시루봉 중턱에 다소곳하게 감춰져 있는 전형적인 산지가람이다. 요사 건너 산중턱에 서 있는 ‘화암사중창비’에 따르면, 신라 원효와 의상이 이 절에서 수도하였다 하여 창건 시기가 신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원효나 의상이 과연 그렇게 많은 사찰을 모두 창건하거나 그곳에서 공부하였을까? 화암사 중수기에 연대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고려 충렬왕 23년(1297년)부터 33년(1307년)까지 사찰을 중창하고 조선 세종 7년(1425년)에 중건하였으며 선조 5년(1572년)에 또다시 극락전을 중수하였다 한다. 이를 보면 적어도 고려시대부터는 본모습을 갖추고 지금의 이 자리에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정유재란으로 사찰이 전소하자 선조 38년(1605년)에 극락전을 중건하고 광해군 2년(1610년)에는 강당인 우화루(雨花樓)를 갖추어 오늘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화암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극락전(極樂殿)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국 목조건축의 전형인 하앙식(下昻式) 구조를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동안 중국이나 일본 건축에서 흔히 보이는 이 하앙식 건축이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극락전의 발견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건축양식의 전파가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일본으로 전해졌을 것이라는 일부 터무니없는 주장에 학계가 곤혹스러워하던 터였다.
하앙식 구조란 공포 위에 하앙이 경사(傾斜)로 얹혀져 외부에서는 처마의 하중(荷重)을 받고 내부에서는 지붕 하중으로 눌러주게 되어 있어 처마 하중이 공포에 주는 영향을 격감시키게 만든 건축 기법이다. 이 건축은 중국의 웅장한 규모의 건축 때문에 만들어진 기법으로, 백제 건축의 전형이었다. 이러한 전통의 건축 기법이 대처의 흔한 큰 사찰에서는 단 한 채도 발견되지 않다가 이 산골짜기 산중턱 깊숙한 곳에 보물찾기 하듯 숨겨져 있다니 얼마나 반가웠으랴. 하기야 17세기 당시 조선 건축에서 이미 다포식 건축 기법이 무르익을 대로 익어 자유자재로 처마를 뽑아내고 내부공간을 치장했으니 굳이 하앙식을 조선에서 차용하지 않아도 우리 산천의 크기에 걸맞는 아름답고 실용적인 집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앙식을 사용하여 극락전을 지은 것은 오늘날 보아도 놀라울 따름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인 극락전은 다포양식의 맞배집으로, 전면 공포의 하앙단면이 용의 머리와 다리 형태로 투각되어 있는 반면, 건물 뒤로 보이는 하앙은 창같이 끝을 뾰족하게 깎아 경사지게 내리꽂고 있다. 극락전 내부는 불단 위에 亞자형 물림닫집을 설치하여 장엄을 더하였는데, 헛기둥과 화려한 공포대, 운룡(雲龍) 등의 장식으로 천궁(天宮)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국보 316호).
화암사는 전형적인 산지사찰로, 경사면에 축대를 쌓아 누각인 우화루(雨花樓)를 세우고 요사와 전각을 지어 ㅁ자형 마당을 두었다. 마당이라 해도 사방 80자 내외의 작은 공간이니, 초파일이나 백중날 같은 대중법회라도 하려면 더 큰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누각은 가능하면 마당의 높이와 비슷하게 마루를 내어 마당 영역을 넓혔다. 바깥에서 보면 2층의 기둥을 덤벙주초 위에 두고 축대에 의지하여 건축되었지만, 안마당에서 보면 단층의 팔작집이다. 우화루는 이러한 공간 구성에 충실한 교과서 같은 전형을 보여준다(보물 662호).
적묵당(寂默堂) 요사 툇마루에 걸터앉아 우화루를 바라본다. 세월에 결이 삭을 대로 삭은 목어 한 마리가 덩그러니 툇간 위에 매달려 있다. 화암사 목어는 마곡사 대적광전 옆 요사 툇마루 위에 걸렸던 빛바랜 목어와 선암사 큰절 뒤 암자 누각에 걸린 오래된 목어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어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 크지도 않고 화려한 단청도 없이 백골(白骨)의 목리(木理)도 세월의 바람결에 모두 사라지고 이제 그 형태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화암사를 찾아가면서 그 목어 구경을 다시 할 수 있을까 은근히 기대하였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다시 볼 수 있어서 반갑고 또 반가웠다.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 해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올곧게 간직되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박태홍은 이 사이트를 2001년 부터 운영해온 운영자이며,
또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로서,
현재 건축연구소.유토를 운영하고 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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