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맵 |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10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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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마을은 안강에서 형산강 줄기를 따라 포항 쪽으로 가는 도로에서 약 2킬로 정도 들어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은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의 양대 문벌로 이어 내려온 동족마을이다. 지리적으로 형산강의 풍부와 물을 바탕으로 넓은 안강평야가 펼쳐져 있다. 풍수지리상 재물 복이 많은 지형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마을 초입부터 제법 큰 양반 가옥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 이들 기와집들은 종가일수록 높고 넓은 산등성이 터에 양반들의 법도에 따라 집을 배열하고 있으며 오랜 역사를 지닌 큰 집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집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경상도 지방에서 흔히 나타나는 ‘ㅁ’자형이거나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간혹 대문 앞에 ‘一’자형 행랑채를 둔 예도 있다. 또한, 혼합배치 양식으로 ‘ㄱ’자형이나 ‘一’자형도 있지만, 대체로 집의 배치나 구성은 영남지방 가옥의 일반적인 특색을 따르고 있다. 여기에 산과 계곡을 따라 펼쳐진 경관, 오랜 전통을 간직한 저택들, 양반 계층을 대표하는 많은 자료들을 보유하고 유교사상 및 생활관습들이 보존되어 이어져 내려오고 있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전통마을 방문에서는 다리품을 팔아야 제멋을 느낄 수 있다. 버스나 자동차를 타고 들어오면 지나쳐버리기 쉬운 광경이나 장면들이 걸어서 들어오면 확연하고 자세히 보이는 경우가 많다. 양동마을의 간이역인 양자역만 해도 그렇다. 지금은 새 도로가 나 있어 양자역이 잘 보이지 않지만 얼마 전만 해도 작은 간이역 주변에는 봄이면 철쭉, 여름이면 무궁화,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어우러져 시골역의 정겨움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큰 도로에서 10여분 걸어서 오다 보면 왼쪽으로 안락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곳은 형산강, 안락천, 기계천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풍수에 따르면 합수지역은 부를 상징한다고 하며 이 마을도 이러한 풍수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많은 인재와 부를 지니고 있다.
마을 초입에는 지금 유물전시관 건립이 한창이고, 그 옆에는 1913년에 세워진 양동초등학교가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이 마을의 지형이 ‘물(勿)’자 모양의 길지여서 마을 정면에 학교를 세워 ‘혈(血)’자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또한 일본인들은 여기서도 철길을 마을 앞으로 지나가도록 가설해 풍수지리에 입각한 우리의 전통 사상과 우리 강산의 기(氣)를 흐리게 하고 있다. 지금은 후손들에 의해 마을 건물들의 방향도 남향에서 동향으로 옮겨지는 등 전통적인 형태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전통마을의 이미지를 손상시킨다는 뜨거운 여론에 밀려 마을 앞 중앙에 있던 교회도 이전하여 학교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학교 맞은편의 성주산 끝자락 중턱에는 월성손씨 가문의 서당인 안락정(安樂亭)이 있는데, ‘一’자형 건물이며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두었다. 별도의 담장으로 꾸며져 있는데, 길 아래서는 숲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고 지붕만이 조금 보인다. 안락정으로 오르는 초입까지 오면 마을의 실체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학교를 지나면 구멍가게를 앞에 두고 마을의 전경이 서서히 모습을 나타낸다. 전면으로는 마을 한중간에 가장 크고 멋진 향단(香壇) 건물과 관가정(觀稼亭)이 보이는데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마을의 모습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특히 대부분의 마을이 산자락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는 표현에 걸맞게 마을의 초입을 바라보고 구성되어 있는 것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마을 아래 자그마한 여러 동산이 모이고 집들은 이 동산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어서 처음에 이 마을을 찾는 일반인들이 보고 가는 것은 실제 양동마을의 1/4 정도에 불과하다. 양동마을은 항아리처럼 입구는 좁고 뒤로 갈수록 넓어지는 모양이다. 마을은 크게 아홉 개의 골짜기로 되어있고, 그중 일곱 개 골짜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 따라서 마을 구석구석을 대충 보더라도 반나절의 여유는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평지 마을은 대개 뒷산을 주산으로 형성되지만, 양동마을은 산지형으로 산 능선을 따라 두 가문의 종가와 후손들의 집들이 줄지어 있다. 그래서 한층 자연과 더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려면 안산인 성주산에 올라가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한눈에 전체적인 ‘물(勿)’자 모양의 마을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겨울철이 좋다.
이러한 유적들을 지닌 양동마을은 옛날부터 사람이 살기 적합한 곳이라는 걸 증명해 준다. 입향조 이전에도 많은 조상들이 살다가 사라진 흔적이 너무나 또렷이 남아있는 곳이 양동마을이다. 병자호란, 임진왜란,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양동마을이 현재처럼 전통 한옥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을에는 특히 정자가 많이 있다. 영남 일대에서 제일 크다는 심수정(心水亭)은 여강이씨 문중의 정자인데, 이곳의 정자들은 단순히 여흥을 즐기는 곳이 아니라 조상을 추모하고 학문을 정진하던 공간이어서 온돌방이 있고 부속 건물도 있는 게 특징이다. 특히 심수정의 함허루(涵虛樓)는 다른 곳의 정자에서 볼 수 없는 팔각기둥이 마루를 통과하면서 원형으로 바뀌어 있는데, 천원사상을 근본으로 한 성리학과 그 속에서 선비가 수양을 통해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양동마을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특히 우리의 전통 가옥들이 눈길을 끈다. 그래서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마을에는 국보 1점과 보물 4점, 중요민속자료 13점, 도지정문화재 5점, 향토지정문화재 9점 등이 있으며, 이 중 건축문화재로는 보물 3점(무첨당, 관가정, 향단)이 있고, 중요민속자료로는 제23호인 손동만가옥을 비롯하여 13점이 지정되어 있다. 또 민속자료로는 양동 대성헌과 문화재자료인 손종로 정충비각과 향토문화재인 경산서당을 비롯하여 9점이 있다. 가히 조상의 숨결이 지금까지 살아 전해져 내려오는 건축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양동마을을 답사해보면, 여러 계곡이 모인 곳에 작은 소그룹의 집들이 모여 있고, 그 사이에는 숲이 있어 언뜻 보기에는 몇 개의 마을이 모인 것처럼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한편, 마을을 다니다 보면 작은 오솔길을 많이 만나게 된다. 오솔길을 따라 숨바꼭질 하듯 숲속에 숨어 있는 집들을 찾아다니는 일도 매우 재미있는 경험이다. 대부분의 다른 마을들에서는 집들이 담장과 담장의 연속된 이음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양동마을은 집들마다 자신만의 담장이 있고 사대부 집들은 좀 더 멀리 거리를 이격하여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마을에는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고목이 많이 보인다. 서백당의 향나무와 관가정의 향나무를 비롯하여 회화나무가 정자마다 있다. 향나무는 멋도 아름답지만 사계절 푸르름을 갖추어 선비들의 강직한 사상에도 일치되기에 곳곳의 고택 앞뜰이나 사랑채 앞에는 수 백 년은 됨직한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또한 선비수, 학자수라고도 불리는 회화나무도 많이 눈에 띄는데, 이 나무는 소나무 다음으로 조선시대 우리 민족이 선호하던 나무의 하나로 정자나 공부하는 장소에는 한두 그루씩 꼭 심어져 있다. 회화나무 세 그루가 심어져 있으면 잡귀를 물리친다고 하는 벽사의 풍습도 전하는 나무로, 마을 앞에서는 느티나무를, 마을 안에서는 회화나무를 쉽게 볼 수 있다.
이 마을에 있는 사대부가들은 대부분 뒷동산으로 나가는 협문을 두고 있는데, 뒷동산으로 연결되는 통로인 일각문을 빠져 나오면 봄에는 싱그러운 새싹과 꽃들이 만발하고, 동산마다 봄기운이 넘쳐 마을 전체에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여름이면 녹음 짙은 나무들 사이로 걸으면서 뜨거운 태양을 피해 산책을 할 수 있다. 가을이면 상수리나무, 졸참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수북이 쌓인다. 낙엽을 밟으며 걷는 발끝의 감촉이 부드럽다. 단풍이며 집집마다 주렁주렁 열린 홍시를 보면서 결실의 계절을 느낄 수도 있다. 이와 같이 협문은 자연과 직접 만나는 통로요, 자연으로 향한 문이다.
마을 뒷동산의 하나인 물봉동산에 오르면, 멀리 안강 뜰과 흥덕왕릉이 있는 어래산이 보인다. 가깝게는 예전에 주막이었다는 초가지붕 세 채가 설창산과 어울려 그림처럼 앉아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꿋꿋이 자리하는 한옥의 정취가 풍기는 전통 마을의 분위기에 젖어들기에 그만이다. 그리고 초가 담장 아래에는 이름 모를 다양한 색깔의 꽃들이 담장과 어울려 전형적인 시골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빠져들게 한다. 또 초가집 지붕이나 토담집 담장 위를 보면 다른 마을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광경을 볼 수도 있다. 생솔가지를 담장 위에 엮어 올려둔 모양인데, 이는 벽사의 의미를 띠고 있다.
양동마을은 볼거리만큼이나 음식도 풍성한 곳이다. 넉넉한 안강 뜰에서의 가을걷이가 끝날 때쯤이 되면 집집마다 전통 쌀엿, 유과, 떡들을 만들고 제사가 많은 종가집에서는 고유의 청주를 만든다. 양동마을의 며느리가 되기 위해서는 청주는 기본으로 담가야 한다고 할 정도로, 제사를 많이 지내야하는 이 마을에서는 지금도 제사를 지낼 때마다 직접 만든 청주를 사용한다고 한다. 양동마을의 청주라고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집집마다 누룩의 양과 찹쌀, 국화, 솔잎 등 재료의 배합에 따라 향과 맛이 모두 다르다. 나는 청주의 참 맛을 보름달이 휘영영청 뜨던 야심한 밤의 양동마을 성주산에서 경험하였다. 향단 사랑채 대청마루에서 종손이 내어준 청주를 마신 적이 있는데, 안주로는 문어와 상어고기와 나물무침 등의 제사음식이 나왔다. 조촐하지만 비할 데 없이 맛있고 정갈한 음식들이었다. 그 날 마신 청주의 맛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물봉동산을 비롯한 수졸동산에 올라서서 마을의 풍경을 바라보고, 삶의 뜨거운 박동을 느낄 수 있는 이 마을은 사람의 발길 닿는 곳마다 소중치 않은 곳이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양동마을은 전통을 계승하면서 우리 문화의 창달을 위하여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전해가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75호인 양동(良洞) 상춘헌고택(賞春軒古宅)은 서백당으로 가는 마을길 초입 우측의 근암고택과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가옥이다. 조선 영조 6년(1730)에 동고 이덕록이 지은 집이며, 그의 후손인 이석찬의 호를 따 ‘상춘헌’이라 이름 하였다. 지금도 걸어서 올라가기 어려운 급경사를 올라서면 담장 끝으로 거대한 느티나무의 가지가 사랑마당을 가득 채우고, 맞은편으로는 향나무가 가파른 언덕을 따라 바닥으로 기어오르는 모양인데, 사람이 오르기 힘들 듯, 향나무도 최선을 다해서 사는 모습처럼 나무둥치에 비하여 잎과 가지가 매우 열악하다. 이 두 나무가 이 집의 바깥대문을 대신하고 있다.
한편, 넓은 사랑마당에는 산 쪽으로 넓게 담장을 둘러쳐서 화단을 만들어 놓았다. 그 위로는 사당이 모셔져 있다. 특별히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 화단은 전면으로 근암고택이 시선을 막으므로 사랑채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인공 화단으로 대신하고자 했던 집 주인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마당 북단, 사당 아래에 만들어 놓은 3단의 화계에는 꽃과 나무를 심어 사랑채 화계와 조화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사랑채의 기단은 자연석을 한 줄씩 엇걸리게 쌓는 막돌허튼층쌓기방법으로 2단으로 쌓아서 중간에 화계(花階)를 두고 여기에 나무와 꽃을 심었다.
건물의 배치는 경상도 지방의 일반적인 평면구조인 튼 ‘ㅁ’자형으로, ‘ㅁ’자의 안채에 ‘一’자의 행랑채를 갖고 있으며 행랑채 가운데에 중문을 두었다. 사랑채와 행랑채 사이에 협문을 두어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안채의 날개채와 행랑채 사이는 담장으로 막고, 아래로 배수구를 만들어 안채에서 나오는 빗물은 이 담장 아래 배수구로 나가게 하였다. 부엌은 후원 쪽으로 출입문을 두어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안채의 기단은 커다란 막돌을 3벌대로 허튼층쌓기 하였고, 그 위에 덤벙 주춧돌을 놓은 다음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으며, 납도리 3량 구조에 홑처마이며 지붕은 안채는 팔작지붕이고 날개채는 맞배지붕이다. 평면은 두 칸의 대청과 한 칸의 건넌방을 두고, 건넌방 앞에는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고, 하부에는 아궁이를 두어 난방을 하도록 꾸몄다. 난간은 띠장을 횡으로 두 개 건너지르고 중간중간에 난간동자 기둥을 세워 꾸민 것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부엌이 있는 날개채는 두 칸의 온돌방과 기단을 한 단 아래에 두고 두 칸의 부엌을 두고 하단부는 판벽에 판문을 달고 상부에는 안방에서 사용하는 다락을 꾸며 가사에 관계된 여러 물건들과 음식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이 마을에서 안강으로 나가던 옛 고갯마루에는 전혀 현대적 기법을 가미하지 않은, 온전한 초가삼간 하나가 있다. 옛날의 주막이며, 최근 들어 마을에 복원된 다른 초가집들과는 모습과 느낌이 사뭇 다르다.
뒷산을 닮은 초가지붕은 그야말로 보기에 여유롭고 편안한다. 어머니의 품 같은 여백도 느껴진다. 마을 초입에 당당히 서 있는 커다란 기와집들을 많이 본 탓인지 이런 느낌은 더욱 소중하게도 생각된다.
이 밖에도 양동마을에는 산도 많고 집도 많다. 집과 집 사이를 지나다닐 만한 산길과 오솔길이 숨바꼭질 하듯 많은 것도 다른 마을과의 차이점이다. 집과 집 사이에는 나무숲을 통하여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더욱이 다양한 나무와 사람들의 발자취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이어진 동산이 연결되어 있는 것과 여러 계곡마다 많은 집들이 모여서 거대한 마을을 조성하고 있는 마을을 걷노라면, 새로운 공간으로의 도입에 신비로움이 더하는 마을의 멋을 느끼게 된다.
박태홍은 이 사이트를 2001년 부터 운영해온 운영자이며,
또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로서,
현재 건축연구소.유토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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