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맵 |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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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씨행단은 광덕으로 가는 길가의 중리 마을 중간에 있다. 이 마을은 설화산 주봉이 북동 방향으로 이어져 내려오다 양지 바른 들판을 감싸 안은 지형에 생겨났다. 이 마을은 몇 채의 한옥들이 남아 있고 신창 맹씨들이 중심이 되어 살고 있는 마을이다. 또한 중리 초등학교 옆에는 맹사성 선생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집안의 공덕비가 비각 안에 잘 모셔져 있다. 이 길을 따라 맹씨 집안에 들어가려면 설화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흐르는 다리를 넘어야 한다.
집 앞에는 커다란 회화나무와 거대한 향나무가 서 있어 오랜 세월, 이 터전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대문은 약간 높은 대지 위에 있어 계단을 올라가야 되는데, 좌우에 2단의 화계를 만들어 향나무와 다양한 꽃을 심어놓았다. 봄과 여름에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면 바깥마당이 온통 꽃의 군무가 시작된다. 대문채의 규모는 다섯 칸으로, 좌우 반 칸 크기의 창고와 아궁이를 두었다. 대문채는 행단으로 올라가는 방향에 두 칸의 방을 두었고, 우측에는 빈지널을 이용한 곡식창고와 창고가 있다. 대문채에 굴뚝이 따로 없고, 화방벽 중간쯤 높이에 암키와 한 장 크기로 구멍을 내어둔 것이 흥미롭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찾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안채가 나타나는데 맹사성 선생의 21대손이 기거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맹씨 행단과 고택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높은 단이 형성되어 있어 사랑채에서 안채를 바라보면 지붕만 겨우 보인다. 이 집은 외곽 담장만 있고, 안채와는 대문 없이 단의 차이로만 구분 지었다. 이것이 맹사성 선생의 청백리다운 공간 구성 방법이 아닌가 한다.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면 사랑채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끝까지 올라가니 우측에 아름드리 큰 은행나무 두 그루가 먼저 시선을 잡아끈다. 이 나무는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에 고불 맹사성 선생이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집에 대한 역사를 소개하는 문화재청과 문중의 말을 들어보자. 이 집은 원래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이 충청도 도순문사의 휘하에서 왜구를 무찔러 전공을 세우던 때에 살던 집이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최영 장군은 공민왕 때 조일신의 난, 흥왕사행궁의 변란 등을 평정하고 홍건족의 침입을 격퇴시켰는가 하면, 고려 우왕 2년에는 왜구까지 무찔렀다 한다. 공을 인정받은 최영 장군은 철원부원군과 수문하시중으로 임명되면서 개성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그는 이 집을 손주사위인 맹희도(孟希道, 맹사성의 부친)에게 물려주었다. 그때부터 이 집은 신창 맹씨의 집이 되었다 한다.
맹사성은 고려 우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호는 고불(古佛), 시효는 문정(文貞), 본관은 신창(新昌)이며 고려 전교부령(典敎副令)을 지낸 맹희도의 아들이다. 대사헌으로 일할 때 평양군 조대림을 신문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죽임을 당할 뻔한 적도 있다. 청렴하면서도 강직한 선비정신을 높이 평가한 세종대왕이 그를 우의정에 앉혔다.
이 집 마당가에는 당시 맹사성이 단(壇)을 만들어 공부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우뚝 서 있어 고택과 함께 흘러간 긴 세월을 반증해 준다. ‘맹씨행단’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공자가 은행나무 위에서 가르쳤다는 얘기에서 나온 말로, 학문을 닦는 곳을 행단이라 했다.
대문채에 들어서면 먼저 장독대가 우리를 반긴다. 비교적 많은 장독들이 질서 정연하게 조로록 서 있다. 옹기장이의 시원한 손놀림에 따라 초화문이 하나같이 다르게 표현된 장독들. 겨울에 장독 뚜껑 위로 흰 눈이 소복이 쌓이면 견줄 만한 운치가 따로 없다.
문간채 좌우로 길게 돌담이 둘러쳐 있다. 돌담장에 기대어 핀 꽃들이 너무나 정겹고 사랑스럽다. 안마당을 지나면 2벌대 기단을 갖춘 ‘ㄱ’자형 안채가 나타난다. 기와 대신 기와 모양의 시멘트 지붕이고, 벽도 추위를 막기 위한 단열재를 외부에 마감하다 보니 원래의 모습이 많이 변형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대문채를 바라보고 ‘ㄱ’자형으로 배치된 가운데에는 대청마루가 한 칸, 안방이 한 칸을 차지하고, 건넌방을 한 칸, 앞면에는 툇간 마루를 반 칸 두어 풍족하지 않지만 소박한 공간 구성을 이루고 있다. 맹사성 선생의 청백리 같은 정신이 깃들어서인지 안채의 소박한 크기가 이 집안의 분위기에 적당한 것처럼 느껴진다.
우진각 지붕의 안채는 단을 이룬 지형을 이용해 돌담을 문간채 전면에 2열로 쌓았다. 안채 뒤편으로 여유 있는 후원을 만들었고, 동쪽 언덕으로 난 사랑채와 연결되는 담장 끝 일각문이 텃밭과 구괴정(九槐亭)으로 시선을 안내한다.
고택의 마당에 올라서면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선비의 굳건한 기개를 상징하듯 서 있는데, 이 나무들이 여름마다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준다. 또 가을이 오면 노란 잎새가 고택 하늘 전체를 물들인다. 이 두 나무가 해마다 다섯 가마씩의 은행을 후손에게 선물한다고 하니 스피노자가 말한 ‘세상에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맹사성 선생 역시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마워하고, 후손들이 자연을 마음껏 음미하면서 수확의 기쁨도 함께 누리기를 바라며 나무를 심지 않았을까 싶다.
이 맹씨행단의 건물 기단은 자연석으로, 크고 작은 돌을 가공해 여백에 채우는 형식으로 만들었다. 드잡이공의 섬세한 솜씨가 정말 대단하다. 평면 구조를 살펴보자. ‘공(工)’자형의 본채 건물은 정면이 네 칸이고 측면은 세 칸이며, 대청은 두 칸에 두 칸 크기다. 방은 한 칸에 세 칸으로, 그 안에서 다시 두 칸과 한 칸으로 나누어 꾸몄고, 미닫이문을 설치했다. 대청마루의 앞쪽에는 넓직한 툇마루를 두어 좌우 방으로 출입하는 문에 다니기 쉽게 하고 지붕의 모양이 조금 특이하다. 중앙 두 칸은 대청으로 팔작지붕인데, 양측 칸은 온돌방으로 맞배지붕을 두어 두 개의 지붕이 서로 결합된 형태를 선보인다. 이 집은 우리나라 민가(民家)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조선 초기 민가 건축의 모습을 이해하는 소중한 자료다. 이 집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모습이지만 건물 하나하나에 다양한 표정 처리가 담겨 있고, 세련된 가구 결구법과 섬세한 조각을 감상할 수 있다.
먼저 사면을 둘러보면 문의 형태가 다양함을 알 수 있다. 방문의 경우, 채광을 위한 창문 역할과 출입을 하는 문 기능을 구분한 것이 특이하다. 두 칸의 대청마루 넉살무늬 3분합문은 전면에 머름을 꾸민 문틀에 설치한 것으로, 도리에 등자쇠를 달아 걸 수 있게 했다. 그중 오른 칸 중앙의 분합문은 다른 문보다 살대를 세 개 늘려 문지방만 두고 머름을 없애 출입문으로 삼았다. 이 문 아랫부분에 청판이 붙어 있어 언뜻 보기에는 머름이 있는 옆 문틀과 구분이 어렵다. 도편수의 세심한 정성을 느끼게 한다. 문틀 상부는 머름판을 대어 더욱 탄탄한 느낌을 준다. 전면에는 두리기둥을 쓰고, 후면에는 원기둥을 사용한 기법은 지금까지 보았던 민가 건축의 기둥 배치와 사뭇 다르다. 넉살무늬 살대의 폭이 크고 살대가 두툼한 것은 부석사 무량수전 문과 유사한데, 이러한 방법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주로 사용한 오래 된 가구법이다.
솟을합장이 있는 마루대공을 살펴보자. 마루 벽체의 대공은 끝에 소로를 끼운 모양의 솟을대공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모양은 경북 월성군 안강읍의 이언적 선생 가옥인 독락당의 마루 벽체 대공과 비슷하다. 대청의 가운데 대공은 복화반을 닮은 대공인데, 봉정사 극락전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시대의 주심포계통 고식 양식이다. 맹씨행단의 기둥과 보가 만나는 기둥머리도 살펴보자. 보를 받치는 보아지는 다른 가옥에 사용하는 대들보보다 가늘고 간결하다. 툇보와 기둥이 만나는 보머리와 ‘인(人)’자형 대공인 솟을합장을 받치는 중도리, 대들보 위로 걸리는 머리인 화두아도 동일한 형태로 보아지 끝을 초각으로 꾸며 세련되게 만들었다. 이 또한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주로 사용한 기법이다.
분합문을 거는 등자쇠는 가락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주두 밑 쌍 ‘을(乙)’ 첨차 옆에서 귀걸이를 한 여인의 부드러운 얼굴 모습이 연상된다. 출입문 크기를 방 크기에 비례하여 만든 것이 흥미롭다.
이 가옥은 규모는 작으나 비교적 큰 창문의 크기나 모양이 제각기 달라 보는 이들의 시선을 즐겁게 한다. 창문의 다양한 모습을 전시 해놓은 박물관 같다. 그래서 같은 크기의 창이 나열되는 획일적인 집과 달리 이 집은 다양한 크기의 창문이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걸어놓은 듯 아름다워 보인다. 현대 건축에서는 느낄 수 없는 우리 한옥만의 창문이 주는 특별한 혜택이다.
온돌방 벽에 조그마한 눈꼽재기 창문을 두었는데, 인기척이 느껴지면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동정을 살필 수 있고, 하인이 찾아도 옷매무새를 정리하지 않고 얼굴만 내밀고 편안히 대화할 수 있으니 실용적이면서도 근엄한 사대부의 모습을 지킬 수 있어 편리하다.
또한 비교적 크고 투박한 뒤뜰을 볼 수 있는 대청마루의 바라지창은 머름을 드리지 않고 널빤지문으로 만들었다. 이 또한 오래된 기법이다. 바라지창을 열면 후원과 돌담이 감상되고, 산을 따라 올라가는 소나무를 볼 수 있어 시원한 기분이 든다.
사당 건물은 안채에서 올라와 행단 앞을 지나면 사랑채 왼쪽에 있다. 사당으로 가는 길에는 아름드리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힘차게 서 있으며 좌우에는 괴석과 화단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맹사성 선생의 기개를 존경하는 이들이 많아, 지금까지도 이곳에 화분을 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 ‘세덕사’라는 당호가 걸린 세 칸에 한 칸 크기의 익공계의 사당은 일각문을 통해 들어가는 별도의 담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는 신창 맹씨 선조 3대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바로 고려 말 이군불사(二君不事)의 고결한 절개를 지키다 순절한 상서공 맹유와 돌포공 맹희도, 조선시대의 대표적 청백리인 맹사성의 위폐다.
이 가옥은 협문이 두 개 있다. 행단의 사당인 세덕사 옆으로 난 일각문과 남쪽 끝 언덕으로 나가는 일각문이다. 남쪽으로 난 일각문을 나서면 구괴정이라는 사연이 깊은 정자가 나타난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어우러진 언덕 위에 서 있는 팔작지붕의 건물. 봄이 되면 구괴정 가는 길목에 냉이꽃이 유난히도 많이 피어 마치 노란 양탄자를 밟는 느낌을 준다.
정자는 전면 세 칸 측면 두 칸 규모로 난간을 둘렀고 단청이 예쁘게 칠해져 있다. 민가에서는 보기 드문,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건물이다. 좌우에는 그당시에 심었다는 느티나무 가운데 세 그루만이 남아 있다.
정자를 마주하면 두 개의 편액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삼상당(三相堂)’이요, 다른 하나는 ‘구귀정(九槐亭)’이라 쓰여 있다. 삼상당은 당시 정승을 하던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이 방촌 황희 정승과 독수와인 권진 정승과 함께 이곳에 정각을 세워 놓고 세상살이를 이야기하거나 국정을 논의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구귀정은 친목을 돈독히 하기 위해 한 사람이 느티나무 세 그루씩, 모두 아홉 그루를 심은 데서 유래한다.
정자 마루에 앉아 바라보면 배방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이 보인다. 넓은 논과 밭이 한눈에 들어오고, 한적한 시골 풍경에 고즈넉한 자연미를 느끼게 된다. 한옥은 자연을 해치지 않고 지연과 사람이 하나 될 수 있도록 건축되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곳에 서면 자연과의 조화를 느낄 수 있다.
자연석만으로 쌓은 돌담이 맹씨 가옥을 두르고, 담장 주변의 경사진 후원에는 다양한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 느티나무, 전나무, 감나무 등의 많은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아름드리 소나무와 고목이 고택의 고풍스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우리나라 생활 주거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는 맹씨 고택. 청렴한 선비 정신과 운치 있고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건물이다. 이곳 고택의 대청마루에 앉아 뒤쪽의 널판문을 활짝 열어 놓고, 들고 갔던 차 한 잔을 마시며 맹사성의 〈강호사시가(江湖四詩歌)〉를 읊어보았다.
〈강호사시가〉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연시조(聯詩調)로, 이황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이이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에 영향을 준 작품이다. 학창 시절, 시험에 꼭 나온다고 열심히 가르치시던 국어 선생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박태홍은 이 사이트를 2001년 부터 운영해온 운영자이며,
또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로서,
현재 건축연구소.유토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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