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맵 |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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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위치한 종묘(宗廟)는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 그리고 실제로 왕위(王位)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죽고 나서 왕의 칭호를 올려받은 왕과 그 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행하던 왕실의 사당이다.
조선 왕조를 연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재위 1392∼1398)는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오른 뒤부터 종묘 건설과 도읍지를 정하는 일에 무엇보다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종묘는 왕조의 뿌리를 상징하는 시설이고, 도읍지는 국가 통치의 기반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태조는 즉위 12일만인 7월 28일 자신의 4대조에게 차례로 목왕(穆王), 익왕(翼王), 도왕(度王), 환왕(桓王)으로 왕의 칭호를 올리고, 그 비에게도 각각 효비(孝妃), 정비(貞妃), 경비(敬妃), 의비(懿妃)의 존호(尊號)를 올렸다. 8월에는 신하를 한양에 파견하여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을 손질케 하고, 수리를 끝내는 대로 한양으로 천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발로 천도 계획을 유보하여, 할 수 없이 개성에 있던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허물고 거기에 새 종묘를 짓도록 명하였다. 그 후 태조는 새 도읍의 후보지로 계룡산, 무악 등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1394년(태조 3) 8월 최종적으로 한양을 새 도읍지로 결정하고, 그해 10월 천도를 단행하였다.
한양 천도 이후 태조는 신도읍지에 종묘와 사직을 먼저, 궁실을 다음에 짓고, 마지막으로 성벽을 쌓는 순서로 도성을 건설하였다. 한양 도성 건설은 조선 왕조 건국 후 시행한 국가 차원의 첫 대역사(大役事)였다. 태조는 유교 이념에 따라 궁궐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社稷)을 그 다음 해에 세웠다. 종묘 공사는 천도하던 해 12월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1395년(태조 4) 9월에 마쳤다.
종묘는 창건 당시 대실(大室)이 7칸이었고, 대실 안에는 석실(石室) 5칸을 만들었으며, 대실 좌우에는 익랑(翼廊)을 각각 2칸씩 이어 지었다. 그 외에 별도로 공신당(功臣堂)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 규모의 건물을 지었고, 빙 둘러 담을 쌓았다. 그리고 담 밖에는 신주 7칸, 향관청(享官廳) 5칸, 좌우 행랑(行廊)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齋宮) 5칸을 지었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날을 받아 1395년 10월 4대조의 신주를 개성에서 옮겨와 봉안(奉安)하였다.
조선시대의 종묘 정전(正殿)은 태종, 세종대에 이르러 건축 형식이 정착된다. 태종은 종묘 앞에 가산(假山)을 조성하여 종묘가 주변 언덕에 파묻혀 아늑한 기운이 깃들도록 한 다음 종묘의 건물 형식을 고쳤다. 본래 종묘 건물은 '一'자로 길게 생겼었는데, 지금은 감실(龕室)에 신위를 모신 몸채 건물과 그 양 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온 동·서 월랑으로 구성된 가운데가 긴 П자형 건물이다. 이러한 건축 형식은 태종 때 이루어진 것으로 종묘건축의 기본 틀이 되었다.
현재 종묘를 구성하고 있는 중심 건물은 종묘 정전과 영녕전(永寧殿)으로, 태조가 종묘를 건설할 당시는 종묘 정전뿐이었다. 영녕전은 정전에 모시지 않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별묘(別廟)인데, 세종 때 처음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 종묘 정전의 감실 규모는 5칸이었다. 그러다 1419년(세종 원년) 정종(定宗)이 승하하고 그 신위를 종묘에 모실 때가 되자 종묘 정전 5칸에는 태조와 태조의 4대 조상을 합쳐 다섯 신위로 모두 차 있었다. 세종 때 이 다섯 신위에 더해 정종의 신위를 어떻게 모셔야 할 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종묘에는 다섯 신위만 모시도록 예법에 규정되어 있어서 정종의 신위를 종묘에 새로 모시게 되면 목왕의 신위는 정전에 모실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때 의논을 거듭하여 중국 송(宋)나라의 예를 따라 1421년 10월 종묘, 즉 지금의 정전 서쪽 바깥에 별묘를 세워 목왕의 신위를 옮겨 모실 것을 결정한다. 이 별묘가 지금의 영녕전이다. "조종(祖宗)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의 영녕전은 종묘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셨다고 해서 조묘(祧廟)라고도 한다.
건립 당시 영녕전의 규모는 태실 4칸, 양 옆 익실 각 1칸을 합하여 모두 6칸이었다. 영녕전이 완공되자 그해 12월 목왕의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고, 정전인 종묘에는 익왕의 신위를 제1실로, 도왕 이하의 신위도 차례로 위로 옮겨 모시게 된다. 영녕전 건립으로 조선 왕조의 종묘건축 제도는 종묘와 별묘를 두게 되고 세월이 흘러 봉안해야 할 신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증축을 하게 된다. 지금은 정전과 영녕전을 합하여 종묘라고 부르지만, 원래 종묘는 지금의 정전을 말하며 영녕전은 별묘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본래 종묘 정전에 다섯 신위를 모시기로 하였던 것인데, 그 후 다섯 신위 외에 다른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는 불천위(不遷位)라는 제도가 생겨 종묘 정전에 모시는 신위의 수는 다섯보다 더 많아지게 되었다. 모셔야 할 신위의 수가 늘어나자 칸수를 늘려야 하는 상황이 생겼고, 그 결과 종묘 정전 건물은 증축된다. 조선 초기의 왕들 중 불천위로 결정된 왕은 태종, 세종, 세조, 성종 등이다.
명종대에 이르러 종묘 정전의 부족한 감실을 해결하기 위해 4칸이 증축되어 그 규모가 모두 11칸으로 늘어난다. 그 후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게 되어, 재건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지 못하다가 마침내 1608년 1월(선조 41, 무신년)에 재건공사를 시작하여 5달 뒤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하게 된다.
재건에 앞서 종묘 제도를 임진왜란 전의 건축 형식으로 할 것인지, 소목제(昭穆制)를 기본으로 하는 중국 주나라의 고제(古制)를 따를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신하들 사이에 이루어지다가 결국 종묘 정전을 임진왜란 전의 형식인 11칸 규모로 재건한다. 재건된 종묘는 중국 고대의 제도와 다른, 고려시대에 정착된 종묘 제도를 따랐다. 종묘 정전은 그 후 1726년(영조 2)에 4칸, 1836년(헌종 2)에 4칸을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인 19칸으로 정착하게 된다.
영녕전은 정전과 함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후 1608년 종묘 중건 공사와 함께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되는데, 정전 4칸, 좌우 협실 각 3칸으로 모두 10칸 규모로 중건되었다. 그 후 1667년(현종 8) 좌우 협실 각 1칸을 증축하고, 1836년(헌종 2) 좌우 협실 각 2칸을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종묘를 증축하거나 수리할 때는 종묘에 모신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이 때 이전 장소로는 당시 사용하지 않던 궁궐이나 사당을 주로 이용하였다.
종묘 일곽의 주 출입구는 외대문(外大門)인 정문(正門)이다.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삼문 형식의 건물로 창엽문(蒼葉門)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기단이 있고 전면 중앙에 계단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정문 앞 지면이 높아져 땅에 묻히게 되었다.
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삼도(三涂)가 북으로 길게 나 있다. 널찍하고 거친 돌로 깐 삼도는 가운데가 양 옆보다 약간 높은 凸자형으로 높낮이가 다르게 되어 있다. 가운데의 약간 높은 길은 신향로(神香路)이고, 동측의 낮은 길은 어로(御路), 서측은 세자로(世子路)이다. 어로는 제사 때 임금이 다니는 길이고, 세자로는 세자가 다니는 길이며, 신향로는 제향 때 향로를 받들고 다니는 길이다. 이 길은 어숙실(御肅室), 정전, 영녕전으로 이어지는데, 어숙실에 닿기 전에 오른쪽으로 난 갈림길에는 망묘루(望廟樓)와 향대청(香大廳)이 있다.
종묘 삼도
종묘 삼도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거치고 널찍한 돌로 깐 세 가닥의 길이 길게 나있다. 가운데의 약간 높은 길은 신향로(神香路)이고, 동쪽의 낮은 길은 어로(御路), 서쪽의 것은 세자로(世子路)다.
망묘루는 제향(祭享) 때 임금이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先王)과 종묘 사직을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건물 중 1칸이 누마루로 되어 있다. 향대청은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폐(香祝幣)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었다.
어숙실은 재궁 또는 어재실(御齋室)이라고도 하는데, 왕이 목욕 재계(齋戒)하고 의복을 정재(整齋)하여 세자와 함께 제사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 제향에는 임금이 친히 올리는 친행(親行)과 세자나 대신이 임금을 대행하여 올리는 섭행(攝行)이 있다. 어숙실 일곽은 둘레담과 정문, 동협문(東夾門), 서협문(西夾門)으로 싸여 뜰을 중심으로 북·동·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북쪽의 건물은 어재실, 동쪽은 세자재실, 서쪽은 어목욕청이다. 어숙실 서북쪽으로 종묘 정전이 위치하는데, 제향 때 제관은 어숙실 서협문을 지나 정전 동문을 통해서 정전에 이르게 된다.
어숙실
어숙실어숙실은 종묘에 제례가 있을 때 왕이 목욕 재계하고 의복을 정재하며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
정전 일곽은 네모나게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묘정(廟庭)을 중심으로 남쪽 담 중앙에는 신문이, 동서쪽에는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과 악공과 종사원이 출입하는 서문이 각각 나 있다.
신문을 들어서면 동서 109m, 남북 69m가 되는 넓은 묘정 월대(月臺)가 펼쳐진다. 묘정 월대는 단의 일종인데, 지면으로부터 단을 높여 다른 공간과 성격을 달리하여 천상으로 이어지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하월대는 제관들이 제사를 드릴 때 대기하는 공간으로 헌가(軒架)가 자리잡고 일무(佾舞)를 추며, 상월대는 등가(登歌)가 위치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묘정 월대의 중앙에는 남북을 잇는 신로(神路)가 길게 나 있다.
상월대 위에 설치된 기단에는 길이가 101m인 정전 건물이 서 있는데, 현재의 정전은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감실 19칸, 그 좌우의 협실 각 2칸,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남으로 직각으로 꺾여나온 동·서 월랑 5칸이 자리하고 있다. 묘정 월대 남쪽 아래 동서쪽에는 공신당과 칠사당(七祀堂)이 각각 서 있고, 서북쪽 뒤에는 제향 후 축(祝)과 폐(弊)를 불사르는 예감(瘞坎, 망료위(望燎位)라고도 함)이 있으며, 동문 북으로 수복방(守僕房)이, 둘레담 밖 서북쪽으로는 전사청(典祀廳)과 제정(祭井)이 있다. 그리고 정전 서남쪽으로는 악공청(樂工廳)이 있고, 정전 서북쪽으로는 영녕전 일곽이 있다.
공신당은 역대 왕의 배향(配享) 공신 83 신위를 모신 곳으로, 종묘 정전이 증축됨에 따라 이와 함께 동쪽으로 증축되어 지금은 16칸의 긴 건물이 되었다. 공신당 전면 중앙부 3칸에는 판문(板門)이 설치되어 있고, 나머지 칸에는 하부에 벽체(壁體)를, 그 상부에 광창(光窓)을 설치하였다. 그 외 세 면의 벽은 전벽돌로 감싸여 있다.
공신당
공신당공신당은 조선시대 역대 왕의 배향 공신 83 신위를 모신 곳으로, 정전 묘정 하월대 남쪽 아래 동쪽에 위치하였다.
수복방은 제사를 담당하는 노비와 관원들이 거처하던 방이고, 전사청은 종묘제례(宗廟祭禮)에 사용하는 제수(祭需)의 진찬(進饌) 준비를 하던 곳이다. 뜰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건물을 口자형으로 배치하였는데, 수복방 전면에는 제사에 쓰일 제물을 심사하는 찬막단(饌幕壇)이 있고, 찬막단 동편에는 희생대(犧牲臺)가 있다. 악공청은 종묘제례 때 연주하던 악공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대기하던 곳이다.
정전 건물의 전면은 퇴칸을 구성하는 기둥만 서 있고 벽체 없이 모두 묘정으로 트였으며, 측면과 뒷면은 모두 전벽돌로 두껍게 벽체를 쌓아 내부공간을 어둡게 함으로써 신성함을 높이고 있다. 내부로 출입하는 문은 각 칸마다 두 짝씩 달렸는데, 그 맞춤이 정연하지 않고 약간 뒤틀려 아래위가 벌어져 있다. 이는 혼이 드나드는 통로임을 상징하기도 하고, 실제로 통기구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문하방(門下枋) 좌우에는 신방목(信枋木)이 있고, 신방목 머리에는 삼태극(三太極)이 조각되어 있다.
문 외부에는 발을 칠 수 있게 되어 있어, 제향 때 판문을 열어 발을 늘어뜨리고 제의를 행한다. 내부는 칸막이 벽체 없이 전체가 하나의 공간이 되도록 했으며, 뒷면 퇴칸에는 각 칸마다 신주를 모신 감실을 두었다. 각 감실에는 서쪽에 왕, 동쪽에 왕비의 신주가 차례로 봉안되어 있다. 이러한 신실 구성 형식을 당(건물)은 같으나 실(칸막이)은 달리하는 동당이실(同堂異室) 제도라고 한다.
종묘 정전 감실은 서쪽을 윗자리로 하여 제1실인 서쪽 첫 번째 칸에 태조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동쪽으로 가면서 차례로 태종(3대), 세종(4대), 세조(7대), 성종(9대), 중종(11대), 선조(14대), 인조(16대), 효종(17대), 현종(18대), 숙종(19대), 영조(21대), 정조(22대), 순조(23대), 문조(추존), 헌종(24대), 철종(25대), 고종(26대), 순종(27대)과 각 왕의 비를 합쳐 모두 49신위가 19감실에 모셔져 있다.
별묘인 영녕전은 네모나게 둘레담으로 쌓아 의례를 행할 수 있는 묘정 공간을 형성하고, 남쪽 담에는 신문을, 동쪽과 서쪽 담에는 각각 동문과 서문을 두어 제례시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 영녕전도 정전과 마찬가지로 묘정 월대에 신로가 나 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현재의 영녕전 건물은 중앙에 정전 4칸, 좌우에 각각 협실 6칸씩을 두어 모두 16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좌우 협실 양 끝에 직각으로 덧붙여서 동월랑과 서월랑 5칸이 있다. 내부공간 구성과 이용은 기본적으로 종묘 정전과 같으며, 영녕전 서남쪽으로는 영녕전 악공청이 있다.
영녕전
영녕전영녕전은 가운데 정전 4칸에는 태조의 4대조의 신위를 각 칸마다 모셨고, 좌우 협실 각 6칸에는 종묘 정전에 모시지 않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셨다.
영녕전과 정전이 서로 다른 점 몇 가지를 들자면, 영녕전 제례는 정전보다 한 단계 낮게 행해졌고, 건축 규모 면에서는 정전의 건축 영역이 영녕전보다 넓다. 또 형식 면에서도 영녕전은 4대조를 모신 부분만 정전과 같은 크기와 높이이고, 옆 익실은 정전보다 크기가 작다. 이외에도 영녕전에는 정전에 있는 공신당과 칠사당이 없다. 목조, 도조, 환조, 익조는 추존(追尊)된 왕이므로 신하가 없는데, 영녕전에 모시게 되는 왕도 도리상 신하를 데리고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작용한 것이다.
영녕전 정전에는 목왕, 익왕, 도왕, 환왕의 순으로, 서협실에는 정종(2대), 문종(5대), 단종(6대), 덕종(추존), 예종(8대), 인종(12대), 동협실에는 명종(13대), 원종(추존), 경종(20대), 진종(추존), 장조(추존), 영왕과 각 왕의 비를 합쳐 모두 34신위가 16감실에 모셔져 있다. 종묘에는 한때 폐위되었다가 숙종 때 복위된 단종의 신위는 영녕전에 모셔져 있는 반면,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정전과 영녕전 모두에서 제외되었다.
종묘는 제례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화려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종묘의 모든 건축은 지극히 단순하고 절제되어 있다. 묘정 월대와 기단 위의 건물은 신로를 표시하는 선과 몇 개의 판위(版位), 그리고 장식이 배제된 건축 구조 등 과감히 생략된 조형과 단순한 구성으로 종묘에 구현해야 할 건축 의도를 철저하게 나타내었고, 단청 또한 극도로 절제되었다.
신로, 월대, 기단, 담 등 필요한 공간만 담은 구성과 구조, 장식과 색채의 간결함은 종묘건축을 상징적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특히 땅 끝까지 펼쳐지는 듯한 월대는 안정을, 수없이 반복되는 듯한 기둥의 배열은 연년세세(年年歲歲) 끊이지 않을 왕위의 영속을, 또 중력을 거부하며 수평으로 하늘 끝까지 펼쳐지는 듯한 지붕은 무한을 연상케 한다.
종묘제례는 왕실의 조상을 추모하는 국가의 제례로서, 조선시대의 모든 제례 가운데 가장 격식이 높은 의식이었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종묘제례는 정전에서 매년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지내는 대향(大享, 四時大享)과 섣달 그믐에 지내는 납일제(臘日祭), 영녕전에서 거행하는 춘추(春秋) 제사, 그리고 속절(俗節), 삭망에 치르는 향사(享祀) 외에 종묘에 와서 빌거나 고하는 기고(祈告) 의식, 햇과일이나 햇곡식 등 새로운 물건이 나왔을 때 신물을 바치는 천신제(薦新祭), 그리고 왕세자, 왕비, 왕세자빈이 종묘 영녕전에 와서 비는 알묘(謁廟) 의식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 종묘제례는 횃불과 초를 밝히고 한밤중에 봉행하였는데 1969년부터 매년 1회 올리다가 1971년 이후 전주리씨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 일요일 낮에 정전과 영녕전에서 각각 한 차례 올리고 있다.
종묘제례
종묘제례조선시대에는 종묘제례를 정전에서는 매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섣달 그믐에 다섯 차례 지냈으며, 영녕전에서는 봄과 가을에 두 차례 지냈다. 현재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낮에 정전과 영녕전에서 각각 한 차례 올리고 있다.
종묘제례에 임하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기 위해 행사 집사관은 7일 전부터, 기타 제례 참석자는 3일 전부터 제계를 한다. 종묘제례는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신을 영접하고, 음식과 술을 올려 즐겁게 해드린 다음 신을 보내드리는 순서로 행해진다.
종묘제례악은 악(樂)·가(歌)·무(舞)를 갖추어 연주하는 음악이다. 동양의 고전인 『악기(樂記)』에서 "악·가·무를 모두 갖춘 것을 악(樂)이라 한다"고 한 것처럼 종묘제례악은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춘 보기 드문 문화유산이다. '악'은 악기의 편성과 연주, '가'는 악장의 구성과 가락, '무'는 일무(佾舞)의 의물(儀物)을 뜻한다. 음악은 등가(登架)와 헌가(軒架), 일무로 구성된다.
종묘제례악의 악장은 원래 세종의 창작품이었다. 세종은 "우리나라의 음악이 비록 다 잘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울 것도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바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 하여, 전래 향악과 외래 음악인 고취악(鼓吹樂)을 참고로 아악(雅樂)을 대체할 종묘제례악을 창제하였는데,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태평은 왕의 문치(文治)가 창성한 내력과 문덕(文德)을 노래하였고, 정대업은 외적과 맞서 싸운 왕의 무공(武功)을 호기 넘치는 시어(詩語)로 칭송하였다.
현재의 곡은 세조 때 다시 한 번 가다듬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최근에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일무와 함께 왜곡, 변모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조선시대의 종묘제례악 일무는 본래 36명의 무원(舞員)들이 열지어 육일무(六佾舞)를 췄는데, 조선 말 고종이 황위에 오른 이후 64명이 춤사위를 짓는 팔일무로 바뀌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종묘 일곽은 사적 제125호, 정전은 국보 제227호, 영녕전은 보물 제821호로 지정되어 있고, 종묘는 1995년 12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정기총회의 정식 의결을 거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으며,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 5월 세계무형유산(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었다.
박태홍은 이 사이트를 2001년 부터 운영해온 운영자이며,
또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로서,
현재 건축연구소.유토를 운영하고 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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