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사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711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885년(헌강왕 11)에 조구(祖丘)가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 절 앞산에서 채굴한 금으로 불상을 주조하였기 때문에 절 이름을 보석사라고 하였다.
그 뒤에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고종 때 민비(閔妃)가 중창하여 원당(願堂)으로 삼았으며, 1912년부터는 31본산의 하나로서, 전라북도 일원의 33개 말사를 통괄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진영각·심검당(尋劒堂)·산신각·응향각(凝香閣)·체실(體室)·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다포집 맞배지붕이며, 법당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관세음보살·문수보살의 좌상(坐像)을 모셨는데,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섬세하며, 상호가 원만하고 자비로워 조선시대 불상 중에서는 극치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진영각은 휴정(休靜)·유정(惟政)·영규(靈圭)의 영정을 모셨던 곳이나 최근에 영정을 도난당하였다. 또한 이 절의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는 공주의 청련암(靑蓮庵)과 보석사에서 무예를 익힌 뒤 임진왜란 때 왜병과 싸우다가 전사한 승병장 영규의 순절비로서, 1839년 5월에 금산 군수가 절 입구에 세운 것이다. 영규가 순국한 내용을 적은 이 비는 민족 항일기에 일본인에 의해서 자획이 뭉개지고 땅에 묻혔던 것을 1945년 정요신(鄭堯臣)이 찾아서 다시 세웠으며, 높이는 약 4m이다.
이 밖에도 절 입구에는 둘레 11m의 큰 은행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창건주 조구가 제자 5인과 더불어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상징하는 뜻에서 둥글게 여섯 그루를 심은 것이 하나로 합해졌다고 하며, 나라에 이변이 있을 때는 24시간을 운다고 한다.
관촉사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254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968년(광종 19) 혜명(慧明)이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 조성한 ‘은진미륵’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꺾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보았더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속으로부터 솟아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바위로 불상을 조성할 것을 결정하고 혜명에게 그 일을 맡겼다.
혜명은 100여 명의 공장과 함께 970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006년(목종 9) 불상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불상이 너무 거대하여 세우지 못하고 걱정하던 어느날, 사제총에서 동자 두 명이 삼등분된 진흙 불상을 만들며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먼저 땅을 평평하게 하여 그 아랫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경사지게 쌓아 그 중간과 윗부분을 세운 다음 모래를 파내었다. 혜명은 돌아와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 불상을 세웠다.
그런데 그 동자들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화현하여 가르침을 준 것이라고 한다. 불상이 세워지자 하늘에서는 비를 내려 불상의 몸을 씻어 주었고 서기(瑞氣)가 21일 동안 서렸으며, 미간의 옥호(玉毫)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었다.
중국의 승려 지안(智眼)이 그 빛을 좇아와 예배하였는데, 그 광명의 빛이 촛불의 빛과 같다고 하여 절이름을 관촉사라 하였다.
이 밖에도 이 불상에 얽힌 많은 영험담이 전하고 있다. 중국에 난이 있어 적병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이 불상이 노립승(蘆笠僧:삿갓을 쓴 승려)으로 변하여 옷을 걷고 강을 건너니 모두 그 강이 얕은 줄 알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 과반수가 빠져 죽었다.
중국의 장수가 칼로 그 삿갓을 치자 쓰고 있던 개관(蓋冠)이 약간 부서졌다고 하며,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국가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이 빛나고 서기가 허공에 서리며, 난이 있게 되면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었다는 등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불상에 기도하면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졌다고 한다. 1386년(우왕 12) 법당을 신축하였고, 1581년(선조 14) 거사(居士) 백지(白只)가 중수하였으며, 1674년(현종 15) 지능(智能)이, 1735년(영조 11) 성능(性能)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관음전과 삼성각(三聖閣)·사명각(四溟閣)·해탈문(解脫門)·현충각 등이 있으며,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218호로 지정된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과 보물 제232호인 석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인 배례석(拜禮石),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인 석문(石門), 오층석탑·사적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배례석은 너비 40㎝, 길이 150㎝의 장방형 화강암 위에 팔엽(八葉)연화 3개가 연지(蓮枝)에 달려 있는 듯이 실감나게 조각되어 있다.
또 해탈문인 석문은 양쪽에 돌기둥을 세우고 널찍한 판석을 올려놓은 것으로, 창건 때 쇄도하는 참배객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고 사방에 문을 내었던 것 중 동문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이 절에는 1499년(연산군 5) 가야산 봉서사(鳳栖寺)에서 개판한 ≪목우자수심결 牧牛子修心訣≫·≪몽산법어 蒙山法語≫·≪심우십도 尋牛十圖≫ 등의 판본이 소장되어 있었다. 이는 범어사의 영명(永明)이 옮겨 보관한 것이었으나, 그 뒤에 해인사로 옮겨갔다고 한다.
윤증선생 고택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
중요민속자료 제190호.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윤증이 건축하였다고 하나 후대에 개수 등이 있었던 듯 현존건물은 19세기 중엽의 조선 후기의 주택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 고택은 파평윤씨(坡平尹氏)들의 세거지인 옛 이산현에 있는 이산(尼山)을 배산(背山)하여 인접한 노성향교(魯城鄕校)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집 앞에는 비교적 넓은 바깥마당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 인공 방형지(方形池)를 파고 조그마한 석가산(石假山)을 조성한 훌륭한 정원이 꾸며져 있다.
정원에서 4단석계의 축대를 오르면 오른쪽에 앞으로 돌출한 사랑채가 있다. 그 뒤로 연접하여 사랑채 후면에서 1칸 물려 왼쪽으로 一자형의 중문간채가 자리잡고 있다. ㅁ자형의 안채는 북쪽으로 중문간채와 1칸 떨어져 있어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또, 안채의 서익(西翼) 바깥쪽에 광채가 있다. 기와를 얹은 맞담이 중문간채 좌우로 뻗어서 이 광채를 포함한 안채의 양측을 둘러쌌고 배후는 야산이 막아섰다. 따라서, 전체적인 배치는 튼口자의 안채에 독립된 사랑채가 접합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안채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넓은 대청이 있다. 그 왼쪽으로 2칸 윗방, 2칸 안방을 두고, 오른쪽에는 2칸 건넌방, 1칸 마루방이 배치되어 있다. 좌측의 안방 전면에 4칸의 넓은 부엌을 돌출시켰고, 우측의 마루방 앞으로는 2칸 안사랑방과 1칸 작은부엌을 달아내었다.
대청 좌우익의 각 방들은 툇마루나 마루에 의하여 서로 연결되도록 하였다. 대청의 배면은 심벽으로 처리하고 쌍여닫이 골판문을 설치하여 놓았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전퇴를 둔 2칸의 사랑방이 놓이고 그 오른쪽에 대청이 배치되었다. 사랑방 좌측에는 1칸 마루방과 하부에 부엌을 둔 작은사랑방이 배치되어 있다. 사랑방 뒤퇴에는 드나드는 입시에 작은마루방이 배설되어 사랑방과 연결되며, 작은사랑방의 뒷방과도 통하도록 되어 있다.
중문간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좌측 두 번째 칸에 중문을 내고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게 1칸 돌아 들어가게 하였다. 안채는 회반죽으로 마감한 막돌허튼층2단쌓기를 한 기단 위에 화강암 덤벙초석을 놓고 모두 방주를 세웠다. 주상에는 주두 없이 도리와 장여만 있는 민도리집이다.
대청·상부가구는 5량가로 동자주 없이 중도리의 장여를 대량 위에 끼워 걸쳐놓은 간소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종량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워 뜬창방을 올려놓고 그 위에 소로를 놓아 장여와 종도리를 받고 있다.
사랑채는 5량가로 안채의 구조기법과 유사하다. 다만, 화강암바른층쌓기 한 기단과 네모뿔의 화강암정평초석을 사용한 것이 다르다. 이 집은 모든 부재의 마감이 치밀하고 구조가 간결하면서 견실하여 아름다운 입면과 함께 신선한 맛을 풍기는 조선 후기 주택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文化遺蹟總覽-忠淸道-(文化財管理局, 1977)
文化財大觀-重要民俗資料篇 上-(文化財管理局, 1985)
韓國의
建築-傳統建築篇-(金奉烈, 空間社, 1985)
장곡사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15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850년(문성왕 12)에 보조선사(普照禪師)가 창건하였고, 그 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많은 중건중수를 거쳤으나 자세한 연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1346년(충목왕 2)에 현재 보물 제337호로 지정된 금동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하였으며, 1777년(정조 1)에 상대웅전을 중수하고 「칠갑산장곡사금당중수기」를 지었다. 1866년(고종 3)과 1906년(광무 10), 그리고 1960년에 대규모의 중창이 이루어졌다. 1969년 봉향각(奉香閣)을 건립하였고, 1998년에는 범종루의 범종과 운판을 조성하였다.
1999년 염화실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경사지를 닦아 위아래에 절터를 만들었는데, 아래에는 범종루·대웅전·설선당(說禪堂)·심검당(尋劍堂)·일주문·요사채 등이 있고, 이곳에서 50m 가량 올라간 곳에 다시 대웅전과 응진전(應眞殿)·지장전·삼성각·염화실(拈花室)이 있다. 대웅전이 둘 있는 것이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절의 특징이다. 또한, 이들 대웅전은 건축사상으로도 매우 주목되는 건물로서 상대웅전은 보물 제162호로 지정되어 있고, 하대웅전은 보물 제1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하 대웅전의 방향은 서로 엇갈려 상대웅전은 동남향을, 하대웅전은 서남향을 하고 있다. 상대웅전 안에는 통일신라 때 조성된 국보 제58호의 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가 있으며, 바닥에 유문전석(有文塼石)이 깔려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유존(遺存)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하대웅전 안에는 보물 제337호의 금동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최근 복장(腹藏)을 통해서 고려 말기에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현재 비구니들의 수도처로 이용되고 있으며, 이 절 일대는 군내 최대의 구기자(枸杞子) 산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네군데를 욕심내본다. 2012년 11월 3일(토) ~ 11월 4일(일)
1박은 당연히 해야되겠고, 토요일에 일찍 내려가서 두 군데 (보석사, 관촉사)를 보고 일요일에 윤증선생고택과 장곡사를 보며 올라오는 계획이다.
요새 단풍이 무르익어 어디를 가나 경치는 좋을 것이다.
다들 의견주기 바랍니다~~
박태홍은 이 사이트를 2001년 부터 운영해온 운영자이며,
또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로서,
현재 건축연구소.유토를 운영하고 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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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정도요 .. :) 일욜에 새벽일찍 가는게 나으려나요... 일욜은 천둥님도 가능하데요 ~
도자기 선생님은 중국에 전시하러가셔서.. 돌아오시면 여쭈어볼께요 :)
더 추워지기 전에 바짝 다녀야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