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시절의 한 은사님은 ‘건축은 예술이다’ 라는 점을 강조하시곤 했다. 그 시기에도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른바 순수 예술분야를 생각해보자. 작가로서 이름 있는 사람들은 예술성 높은 작품으로 이야기한다. 건축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건축은 과연 예술이구나.’ 하지만, 어느 작가의 작품이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안 보면 그만이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조건은 그 소유자나 관람자에게 있지 않다. 제한조건이라는 것도 없다. 어떤 재료에 얼마만큼의 돈을 들여서 작업을 하든 오로지 작가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난 후의 평가는 관람자 내지는 비평가에게 달려있다. 심지어는 관람자나 비평가 모두가 혹평을 해도 작가 자신은 개의치 않을 듯도 하다. 아주 후세에 새삼스럽게 시대를 초월한 예술성으로 재평가되는 작가들도 많다.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이라는 얘기다. ‘건축과는 다르구나.’
건축은 건축가 혼자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건축주뿐만 아니라 그 건물의 사용자나 그 도시의 시민과, 심지어는 그 문화와 역사와도 관련 지어진다. 안 보면 그만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아주 옛날, 건축가 아니 아예 직업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건축을 생각해보자. 어떤 이유에선가 공간이란 것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필요한 사람이 직접 만들었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당연히 건축주, 건축가, 시공자가 동일인이었다. 어찌어찌 만들고 보니 괜찮다 싶어 주변에 자랑도 하고, 주변사람 것도 만들어주고 대가도 받고 하던 것이 건축가라는 직업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건축주와 건축가의 입장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건축의 물리적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건축주, 건축가, 시공자라는 3가지의 입장으로 대별된다. 불행하게도 많은 경우에, 이들의 3자가 완전하게 합치되어 건축행위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으며, 그러한 경우를 일생에 몇 번 밖에 만날 수 없는 행복한 것이라는 얘기도 한다. 이러한 미묘한 관계를 조화롭게 만들어 나가는 것 또한 현대 건축가의 중요한 덕목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건축의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축주의 입장은 어떠할까? 시공자에게 바라는 점은? 물론 시공을 잘하는 일이다. 쓸데없는 돈도 들어가지 말기를 바란다. 사용하다가 비가 새서 부르면 푸념 않고 손봐주기도 원한다. 건축가에게 바라는 점은? 이건 좀 미묘하다. 입장 차이도 많은 것 같다. 단계별로 생각해보자. 첫 단계는, 사회제도적 차원에서 건축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법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두 번째 단계는, 이왕 하는 것 예쁘기도 해야겠다. 대개의 경우 두 번째의 이유로 그에 알맞은 건축가를 선정하기를 원한다. 현상공모의 형태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게 선정된 건축가는 꿈에 부푼다. ‘네 꿈을 펼쳐라.’ 하지만 여기에 다시 함정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건축주는 건축가를 먼저 선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서 얘기한 제도적 절차로 건축가가 필요하며, 그에 따르는 부수적인 욕구가 두 번째를 이루는 것이다. 이 예쁘다 혹은 아름답다고 하는 생각에 대한 불일치가 항상 예상된다.
흔히들 건축주와 건축가의 관계는 연인의 관계라고 얘기한다. 초기에는 서로에 대한 장점만이 눈에 들어온다. 서로를 존중하고 칭찬하기 바쁘다. 그런 관계에서는 무슨 일이든 불가능 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이 진행되어가면서, 하나 둘 시각의 차이가 보이기 시작하고 불일치가 발생하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등을 돌리고 만다. 예전보다 건축주를 상대하기가 훨씬 힘들어졌다는 말을 동료 건축가들에게 많이 듣는다. 예전엔 그래도 건축가에게 일종의 전문가로서의 대우가 있었던 것 같다. 집도 많이 지어보고, 책도 많이 보고, 심지어는 해외여행에서 더 예쁜 걸 많이 보고 왔으리라. 하지만 요즈음 이것으로는 건축주와의 변별력을 지니지 못한다. 건축주들도 집을 많이 지어봤고, 책도 많이 본다. 해외여행도 건축가들보다 훨씬 많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공간 치수까지 척척 언급하는 준전문가급의 건축주를 만나는 것도 흔한 일이다. 이제는 더 이상 건축가와 건축주, 혹은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가 아닌 아름다움의 시각적 가치관의 차이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고, 이 정도 되면 설득도 거의 불가능하다. 건축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렇게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건축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프로젝트를 서둘러 마무리하는 일일 뿐일 것이다. 자신의 건축적 역량을 펼쳐 보이겠다던 환상은 깨어진 지 오래다. 결국 ‘내가 했으되, 내가 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 없는 사생아 건축’이 탄생하는 불행한 결과가 빗어지고 만다.
필자는 몇 년 사이에 일본 여행을 갈 기회가 자주 있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일본 건축가의 작업을 보면서, 또 그 지역 행정부의 공무원들이 나와서 건축물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자랑스럽게 건축가를 얘기하고, 심지어는 한글로 번역된 비디오 테이프까지 동원해서 홍보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이 느껴졌다. 물론 그들의 건축에 감탄도 했지만, 필자의 눈에는 그것이 극복할 수 없는 높은 산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최근 우리나라의 건축가들의 역량으로 본다면 그러한 건축의 꽃을 피우는 것은 그리 먼 일이 아니라는 일종의 자부심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관점에서, 그들에게 제일 부러운 점은, 그런 건축가들의 존재가 아니라, 그들이 있게끔 하는 일본사회, 즉 일본 건축주들의 존재이다. 이런 부러움은 일본의 경우만이 아니다. 경제적인 선진국이 아니더라도, 건축가의 생각을 신뢰하며, 건축가로 하여금 자신의 건축적 소신을 펼칠 수 있게 하는 사회가 부러울 따름이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얼마든지 세계적인 훌륭한 건축가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모 학교에서 세계적인 유명 건축가들을 초청해서 지명현상을 개최하고 설계안을 선정하고, 그들과 더불어 건축의 축제도 벌였다고 한다. 아무도 그들의 제안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안을 해치지 않고 시공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왜? 그들은 세계적인 건축가 아닌가? 우리나라에 그런 훌륭한 건축이 실현된다는 것은 당연히 기쁜 일이다. 또한 이미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씁쓸하다. 왜 우리 사회는 우리 건축가들에게 신뢰를 부여해서 그들을 세계적 건축가로 ‘만들기’ 보다는, 그러한 토양에서 ‘만들어진’ 기성품 건축가를 수입하려 하는 생각만 하는 것일까? 몇몇의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성장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면, 당연히 그 건축가의 뛰어남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 건축가를 자기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서 오늘날의 그 인물이 탄생하게 되었고, 그 건축가로 인해 존경심과 자부심을 지닌다는 배경이야기가 비슷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왜 그리도 부러운 것일까?
왜 우리는 세계적인 건축가를 지니고 있다는 자부심 보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만을 느끼려 하는 것일까?
박태홍은 이 사이트를 2001년 부터 운영해온 운영자이며,
또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로서,
현재 건축연구소.유토를 운영하고 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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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께서 쓰신 글을 오랜만에 다시 읽어봅니다. 교수님의 글을 통해서 저도 모르게 처음 이곳 미국에 왔던 제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Thank you professor. 항상 감사드립니다. 다 교수님 덕분입니다.
잘 지내고 있지? 이렇게라도 흔적을 보니 반갑다~
네 덕분에 나도 다시 읽어보니 저 시절이 새록새록하네...건강해라~ 언제 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