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전화의 첫 마디는 '거기 어디죠?’ 혹은 ‘누구 좀 바꿔 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요즘 전화의 첫 마디는 ‘어디야?’ 혹은 ‘통화 괜찮아?’ 한다.
예전 전화는 고정된 장소를 의미했다. 하지만 전화 받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요즘 전화는 특정 인물을 의미하지만, 장소와 상황은 확인되지 않는 까닭이다.
예전에 전화를 걸기 위해서는 전화번호를 외우거나, 수첩을 들춰야 했다.
요즘에는 전화에 저장된 이름을 찾거나 단축번호를 누른다.
예전에는 자주 거는 친구의 전화번호는 자동적으로 외워졌지만, 요즘은 전화를 두고 나오면 친한 친구와 전화하기도 어렵다.
얼마 전의 인터넷주소는 외우기 쉬워야 했다.
요즘의 인터넷주소는 외울 수는 없지만, 즐겨찾기에 있다. 아니면 검색하면 그만이다.
우리 집을 안내할 때 집의 모양을 묘사하기 보다는 몇 단지 몇 동 몇 호로 이야기한다.
대표값의 시대다. 내용을 이해하기 앞서 포장지만 보고 내용까지 판단하려 한다.
예전엔 쇼핑을 하려면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골랐다. 이것저것 따져보고 힘들게 골라서 구입했다.
요즘 쇼핑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하고, 며칠 있으면 집으로 배달이 온다. 마음에 안 들면 전화해서 바꾸면 그만이다.
자신이 필요한 물품을 애써서 구하는 것이 그 물건에 대한 애착심도 주었다. 옷이 해져도 아까워서 기워 입기도 했다. 요즘은 유행이 바뀌면 멀쩡해도 아낌없이 마음이 떠난다.
예전에 애인을 사귈 때는 몇 년간 사귀었나를 물어봤다.
요즘 애인을 사귀면 날짜를 센다.
교통수단이나 통신의 발달로 우리의 활동 범위는 그만큼 확장 되었고, 우리의 사고 또한 진폭이 달라지고 있다. 다음 세대의 연애는 초시계를 들여다보며 하게 될까? 세상은 정말 인터넷 속도만큼이나 빨라졌나 보다. 어떤 것이든 그 것의 가치유지 주기가 급격히 변한다.
예전 건축주들은 건물이 비가 새지 않기를 원했다.
요즘 건축주들은 건물이 분양이 잘되기를 원한다.
예전의 재산의 가치는 건강한 부동산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의 건강한 부동산이란 현금화가 얼마나 풍족하고 수월하게 되느냐의 가치전환 능력이 더욱 중요한 시대다.
예전엔 외국인만 보면 말을 걸어 올까봐 두려워서 피했다.
요즘엔 너무도 귀찮고 무례하게까지 말을 걸어서 외국인이 피한다.
예전의 슬로건은 ‘세계를 향해’ 였으나 요즘의 슬로건은 ‘세계가 몰려온다’ 이다.
세계화가 됐다는 건 굳이 외국을 나가지 않아도 피부로 느낀다. 경제력도 그만큼 상승했다. 세계에서 몇 안 되는 OECD 회원국 아닌가? 하지만 그에 따르는 우리의 의식수준도 세계화가 됐을까?
예전의 TV는 동네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봤다.
요즘의 TV는 아이들은 각자 방에서, 어머니는 주방에서 본다.
예전에 TV를 본다는 것은 방송시청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웃들과 혹은 가족들 간에 음식과 정을 나누는 매개체의 역할도 했다. 지금은 매체전달의 수단으로만 자리잡고 있다. 정말로 순수하게 본연의 역할로 돌아오게 된 것일까?
예전의 가수는 노래만 잘 하면 그만이었다.
요즘의 가수는 외모도 좋고 말도 잘 하고, 영화도 몇 편 찍어야 요즘 말로 뜬다.
한 두 가지의 능력만으로는 나를 표현하는 데에 부족하다. 동시에 여러 일을 처리하거나 여러 가지 능력을 고루 갖춘 종합적 멀티태스킹이 유효한 세상이다.
예전에는 여태까지 있어왔던 것을 외우기도 바빴다.
요즘에는 여태까지 안 나왔던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기에 바쁘다.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의 시대다. 예전엔 다른 사람들이 해왔던 대로 따르는 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였지만, 요즘에는 새롭고 기발한 것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위험은 당연하게 감수한다.
예전에 고급승용차 운전석에는 정장을 한 운전사가 앉아 있었다.
요즘의 고급승용차 운전석은 청바지를 입은 주인이 탄다.
예전의 청계천은 구정물이 흘렀다. 그래서 누군가가 덮어버리고 차량의 물결이 흘렀다.
요즘의 청계천은 다시 누군가에 의해 수돗물이 흐르게 됐다.
동일한 대상이라도 시대에 따라 사회의 가치관이 바뀌는 것인가 보다. 다음 세대에 청계천은 무엇이 흐를까?.
예전의 강변도로 이정표에는 ‘양화대교 15km’ 라고 씌어있었다.
요즘의 강변도로 이정표에는 ‘양화대교 30분’ 이라고 표시된다.
더 이상 물리적인 거리는 의미 없다. 고향 가는 귀성길은 일본보다도 멀다.
예전의 설계도면은 연필가루를 마시며 작성했다.
요즘의 설계도면은 커피를 마시며 작성한다. 필자의 이 글도 원고지 대신에 컴퓨터의 워드 프로그램이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현장에 전해지는 것은 CD가 아니라 종이로 된 도면이다.
예전에 편지는 수없이 종이를 버려가며 고쳐서 썼다.
요즘 편지는 이메일로 동영상을 넣어가며 수십 명에게 한꺼번에 보낸다.
예전의 리포트는 친구 것을 베끼더라도 시간과 노력이 걸렸다.
요즘의 리포트는 인터넷에 널린 글을 긁어서 가져다 놓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아직도 종이에 출력해서 제출해야 된다.
인터넷에 수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지만, 아직도 우리는 서점을 찾는다.
예전에 인간문명의 지속성을 가져다 준 최대의 발명은 종이였다고 평가된다. 따라서 인간의 문명을 기록하는 종이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느냐에 관심이 집중 됐었다. 종이에 이은 인류의 제2의 위대한 발명은 컴퓨터라고 한다. 그래서 요즘의 관심은 주요 기록매체가 돼버린 CD가 얼마나 수명이 지속될 수 있느냐의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인간의 문명은 매체에 의해 좌우될 것인가?
예전의 건축가는 집 지을 땅을 찾아갔었다.
요즘의 건축가는 땅 없이 3D만으로도 건축을 한다.
시공의 차원을 넘어선 현재의 기술로 가상현실 등의 단어는 더 이상 생소하지 않다. 실제로 지어지지 않는 건축으로도 담론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건축의 대상이 물리적인 것에서 관념적인 것으로의 경향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도 건물은 땅 위에 서있다.
예전에 건축주에게 계획안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둘러보거나, 모형을 만들어서 제시했었다.
앞으로 건축주에게는 가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헬멧을 씌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건축가가 제시하는 공간의 중심에는 항상 인간이 있다.
직업이라는 측면에서도 수많은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다. 기존에 유지되어 왔던 직업들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역할을 수정해야 했다. 이렇게 변하고 또 지속되는 수많은 존재들 중에 건축가라는 위험한 직업은 과연 현재의 모습과 역할을 유지할 수 있을까? 건축이란 그 시대를 주도하고 선도하는 학문이라 했다. 건축가는 그 시대의 흐름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고도 한다. 그 어느 쪽이 되든지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스스로 깨어있고 대처해나가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또 이런 사실만으로도 이미 변화의 의미는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변화가 필요한 시대라면 그 변화의 그늘에 묻혀서 사라지기 보다는 그 변화를 주도하는 주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느 날 돌이켜 격세지감을 느끼기엔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박태홍은 이 사이트를 2001년 부터 운영해온 운영자이며,
또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로서,
현재 건축연구소.유토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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