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하기 전에 캐드나 3D를 배우면 취업이 잘되나요? 어떤 준비를 하고 졸업해야 될까요?'
예전에 어느 학교에 특강을 갔을 때, 끝나고 질문을 받는 시간에 한 학생이 물어온 질문이었다. 그 학생에게 다시 되물어보았다.
'몇 살이지요?'
'25인데요...'
'몇 살까지 살 거지요?'
'예? 수명이 허락한다면 80까지요...'
'그럼 앞으로 몇 년 남았지요?'
'에?...음...' (갑자기 산수가 잘 안된 듯)
(옆의 학생이 참다못해)'55년이요'
'그럼 건축 몇 년 했지요?'
'(자신 있게)4년이요'
'그래요?...1학년 때 교양과목만 들었지요? 방학 때 건축공부만 했어요? 매일 학교강의 나오나요? 토요일, 일요일은? 그러고 나면 실제로는 1년도 될까 말까인데.....'
'......'
'이제 사회로 나가면 학교 생활과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도면 그리는 법, 법규검토, 재료, 디테일, 시공방법 등등 학교에서 하던 컨셉이니 무슨 주의니...하는 것들은 생각할 겨를도 없지요.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야근, 철야를 밥 먹듯이 하고, 방학도 없습니다. 그럴싸한 책 한 권 변변히 읽을 틈도 없습니다. 대학생활에서 얻어야 되는 것은 시간이 주어졌을 때 확실히 얻어야 된다고 봅니다. 이제 1년을 공부해보고 바로 코앞의 일을 걱정해서 이 중요한 학교 생활을 버릴 건가요? 캐드 배우면 당연히 취직 잘 됩니다. 단, 창의적인 건축가로서가 아니라 캐드 기능공으로 말이지요. 본인의 장래 상황에 대한 결정에 따라서 시간 투자를 해야겠지요. 뛰어난 캐드 기능공이 되겠다면 그 길도 말릴 수는 없겠지요. 자신의 대학 생활 목표가 뭡니까? 취직입니까? 미래입니까?'
'........'
답은 못 들었지만 즉석에서 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었다.
이 시기가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민감한 시기인 것 만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이 질문의 내면을 생각해 보면, 졸업예정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조급함의 문제가 아니라, ‘건축을 한다는 것, 혹은 건축인이 된다는 것’의 가치관의 혼란스러움이 또한 염려스럽다. 요즈음의 학생들에게 컴퓨터는 하나의 필수적인 덕목이 되었다. 기본적인 캐드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 다룰 줄 알고, 3D 프로그램도 한 가지쯤은 다루어야 주변으로부터 인정 받는다. 때로는 그 재주를 바탕으로 부수입도 올리게 되니, 상대적으로 빈약한 학생들에게는 일석이조, 삼조의 덕목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기성 건축가들이 일조했다는 책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몇 년 전부터 각종 건축잡지에 나열되고 있는 각종 현상공모전 내지는 프로젝트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현란한 컴퓨터 렌더링들을 보는 학생들은, 그 기법을 흉내 내거나 자료들을 수집하고 어떤 프로그램을 사용했는지 알아내는 것이 건축가가 되기 위한 지름길로 여겨졌을 것이다. 예전에는 이러한 것을 스케치나 모형으로 얻어낼 수 밖에 없었고, 투시도를 잘 그리거나 모형을 깔끔하게 만들 줄 알면 취직전선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각종 마감에 임박해서는 수많은 인력과 물자가 투입되었던 기억이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그러던 것을 간편하게 컴퓨터 앞에서 실제 상황과 거의 흡사하게 표현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도구들이 출현했을 때 건축계는 환호를 올렸다. 그러한 물자와 인력 낭비가 없어질 것처럼 보였다. 서로 앞다투어 이런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인력을 채용했고, 전문업체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됐다. 이 때 각종 현상공모를 통해 양산된 건축가들의 현란한 컴퓨터 기법은, 세계 건축계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진보(?)를 가져왔고, 학생들에게는 건축수업을 하는 데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요소로서 각인되기에 충분했다. 이 시기에 이러한 건축본질에 대한 가치관의 이상발육이 시작된 것이다.
새삼스레 이 무슨 시대착오적이며 퇴행적 발언인가 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분도 있을 것이나, 이것은 새로운 도구의 편리성이나 장점을 부정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각을 되짚어보자는 이야기다. 근본을 생각해볼 때, 모형을 만든다거나, 공간을 스케치 하는 것, 컴퓨터 모델링을 하는 것은 같은 형태의 행위라 할 수 있다. 즉 건축가의 생각이 담겨있는 공간을 미리 경험케 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그런데 같은 일을 하면서 훨씬 적은 인원과 적은 노력으로 동등이상의 결과를 내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게 좋은 도구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도구의 발달에 따라 건축도 발전할 것이 아닌가? 훨씬 효율적으로 도면을 작성해내고, 그 효율로 얻은 시간과 노력을 건축의 가치를 높이는 데에 쓰여질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환영할 일인가? 자기가 생각한 공간을 직접 지어보기 전에 공간화시켜 보고 또한 남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는 이런 훌륭한 도구가 또 있을까? 하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도구와 본질 사이의 엄청난 혼란이 야기된 것이다. 자신의 프로젝트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은 더 이상 건축적 고뇌가 아닌, 3D 프로그램이나 이미지 리터칭 등의 컴퓨터 기법이 되어버렸다. 본질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겉모습의 치장으로 극복하려 하는, 가볍다고 얘기할 수 밖에 없는 경향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을 부추기는 것은 각 학교의 방침도 또한 일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다투어 정규과목에 컴퓨터 기능교육을 포함시킨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 되어 버렸고, 심지어는 방학에도 특강을 한다. 컴퓨터에 능숙한 학생이 취업이 잘되는 것도 또한 현실이고, 그 결과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학교의 입장 때문일까? 필자도 컴퓨터와는 가까운 편이어서, 몇 년 전 한 학교에서 캐드수업을 맡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첫 수업 때 실상을 파악하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캐드를 익히면 도면이 저절로 그려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학생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캐드 명령어 몇 줄을 익히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도면에 표현되어야 하는 내용에 대한 지식자체가 부족한 상황이어서 강의일정을 전면적으로 조정하여, 컴퓨터 교육은 뒷전으로 미루고, 건축제도의 기본개념부터 새로 시작했던 경험이 있었다.
영국에서 한 컴퓨터 업체에 찾아온 한 의뢰인은 결과물이 실제와 유사하지 않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컴퓨터 모델링일 뿐이고, 당연히 모형과 같이 보여져야 마땅하다는 얘기다. 아무리 실체를 모방하고 치장한다 해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서구 건축계와 우리나라와의 컴퓨터의 사용은 그 근본에서부터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그것은 실제의 상황과 유사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프리젠테이션 도구로써 쓰여지고 있는 반면에, 서구의 컴퓨터는 대부분이 건축적 사고의 물질화 및 구현하는 과정의 도구로써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를 접하는 학생들의 시각은 또 어떠할까? 또 다른 종류의 컴퓨터 사용기법으로서만 비춰지는 것은 아닐까? 그 프로젝트의 출발과 과정이, 혹은 환경이 어떠했느냐를 파헤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래픽적으로 그들의 결과물과 유사한 작업을 해낼 수 있는가 하는 데에 더 흥미가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한 증거는 몇몇의 학생 공모전에도 다분히 드러나고 있는데, 서구 유명 건축가들의 프로젝트의 결과를 답습한듯한 상당수의 작품들이 눈에 띄지만, 학생의 입장에서 유명 건축가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그런 프로젝트를 이해하고 따랐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컴퓨터 시기 이전부터의 아주 고전적인 질문이 있다. ‘내용과 형식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질문이다. 그 때의 대답은 늘 같았고, 지금도 같을 것이다. 그 대답이란 ‘두 가지 모두 동등하게 중요하다’ 이다. 내용 없는 형식은 무의미하며,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내용 또한 무의미하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더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혹은 결과물에 대한 포장기법에 현혹되어 그 본질에서 멀어져만 가는 경향에는 경종이 울려져야 한다. 건축의 본질을 몇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해도, 적어도 몇 줄의 컴퓨터의 명령어 사이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을 치장하기에 앞서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는 일이 그 본질에 이를 수 있는 올바른 길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정리가 되면, 사회진출을 앞두고 자기가 준비해야 할 것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명백해지지 않을까?
박태홍은 이 사이트를 2001년 부터 운영해온 운영자이며,
또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로서,
현재 건축연구소.유토를 운영하고 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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